한줄 詩

더 깊은 긍정 - 전윤호

마루안 2019. 11. 17. 19:17



더 깊은 긍정 - 전윤호



저 개도 안 물어갈 놈

아버지가 화나면 하던 말이

자꾸 귓전을 울린다

입 하나가 두렵고

손 하나가 아쉽던 가난한 가족

불여시 같은 년

아내는 그런 말을 가슴에 담고 산다

내 속에서 개는 늙고

여우는 잿빛이 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밉지 않다는 것

벌써 후반전

이번 생은 점수만 까먹었지만

승부는 아직 모르고

나는 지지 않았다



*시집, 아침에 쓰는 시, 역락








심야 극장 - 전윤호



내 이마의 검버섯은

눌어붙은 냄비같아

누구의 요리를 위해 끓었던 흔적일까


요즘 자주 울어

잘 못 걸린 전화가 연인을 찾을 때

빗방울이 난간에 매달려 빛날 때


실패한 줄 알면서 아침에 깨고

아닌 줄 알면서 한밤까지 기다리지

습관으로 숨 쉬는 날들


건전지 교체하라며 삐삐거리는

현관문이 비밀번호를 거부할 때

마지막 보름달이 떠오르네


누구나 알아 떠날 때가 되면

극장의 불이 켜지고 슬픈 주제가가 흐르지

저기 내 검은 배낭을 건네주렴






# 어릴 적 어머니가 그랬지. 타고난 천성이 청개구리라 무던히도 속을 썩힐 때면 "어쩌다 저런 게 내 뱃속에서 나왔는지 몰라?" 내가 세상에 나올 때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걸 증명할 사람은 어머니뿐,, 당신 멀리 떠난 후에야 땅을 쳤지만 회한을 남기고 버스는 이미 떠났다. 언제 후반전이 시작 되었지? 건전지 힘 빠지는 기미도 없이 주름진 중년이 된 개구쟁이는 이 시를 읽으며 다짐한다.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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