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쉬기 좋은 방은 어느 계절에 있지 - 조미희

마루안 2019. 12. 21. 22:51



쉬기 좋은 방은 어느 계절에 있지 - 조미희



늙은 새들

방이 적다고 운다


겨울,

싹트는 발목이 그곳에서 기다린다


자세를 바꾸면 봄으로 이사 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바람이 창을 그려

맨발을 붙인다

다음 장에서 만날 가능성에 기대 본다

멀리서 날아오는 새의 투정을 찢어 호주머니에 숨긴다

의심 없는 온도를 꽉 쥔다


얼어 죽은 고양이와 비를 맞고 죽은 목련꽃 중

어느 쪽이 더 마음 아프지


문상객으로 거리에 서 있다


달이 천 개의 현을 뜯는다

불길한 구름 떼가 몰려오고 달 귀퉁이의 올이 풀린다

달이 줄어든다

오물 같은 침이 뚝뚝 떨어진다

무엇을 삼키려 했던 걸까

빙판길의 이삿짐 트럭

하나, 둘, 셋

잠자지 못하는 시계들의 야반도주

녹지 않은 주소들이 실뭉치에 걸려 자꾸 넘어지는 사이

달이 먹어 치운 집들과

집이 먹어 치운 이삿짐 트럭


쉬기 좋은 방으로 가기 위해

몇 번이고 발목을 전지한다



*시집,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 문학수첩








카운트다운 - 조미희



가난한 자의 투지는

하루를 줄이는 것


달력은 한숨의 공원

파란 의자 빨간 의자에 걸터앉으면

젊음은 빠르게 흐르고 지급해야 할 것은

더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속은 건지 속아 준 건지

불 속에 장작을 던지듯 젊음을 던진다


징검다리처럼 의자가 기다린다

의자를 소비하면 공원은 없어질까?

검은 의자는 페달을 굴려야 하고 

한가로이 날갯짓하는 새도 노동을 하는 중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도, 개미도

꿈틀거리는 것들은 다 밥벌이를 한다

그래서 노동이 아름답다 했나


개가 주인과 산책 나와

걷고 꼬리 치고 공을 받아 낸다


"메리. 잘 했어."

주인은 머리를 쓰다듬고 개의 혀는 침으로 범람한다

개는 오늘 하루를 잘 견딘 것이다


무사히 늙음을 향해서

하나의 한숨을 날려 보내며

창문을 닫는다

단지 하루를 건넜다


내 머리를 내가 쓰다듬듯

쓸어 넘긴다






# 조미희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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