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움을 수선합니다 - 조영민

마루안 2019. 12. 23. 22:13



그리움을 수선합니다 - 조영민



오랫동안 묵혀둔 아버지의 문서를 버리는데
언제 오셨는지
나의 등 뒤에서 구겨진 문서를 하나하나 펴시는 아버지
소문대로라면
평생 남의 논밭만 경작하고 몽당 담배만 골라 피우셨다던,
그가 평생 경작한 꽃은 나였지만
나는 그에게 후끈한 파스 한 장 되어주지 못했다
지금, 모락모락 먼지로 돌아가려는 모든 문서를 버린다
희망조차도 중고품인 이 집에서 나는
장날이면 눈에 띄던 양은냄비 같은 새 달을 갖고 싶었다
올봄 새롭게 유행할 봉숭아꽃이나 고장 없는 오솔길 하나
장만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된 기억일수록
들춰보면 모두 헐었거나 수선한 것들이 전부였다
때로는, 동생의 웃음과 깨진 햇빛도 늘 꿰매 쓰던 그가
장독대의 벚꽃을 수선하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렸을 때는
감자꽃 같은 희망이 원인인 줄 알았다, 그 후로도 줄곧 나는
달빛과 야심한 닭 울음소리를 무수히 허비했고
그는 그때마다 나의 사춘기를 붉게 수소문하곤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의 묵정밭이었다
그가 나의 웃자란 객기를 솎아내는 동안
나는 그의 희부연 여생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허물곤 했다


새로운 묵정밭을 일구려 하셨음일까
재작년 저 세상으로 들일을 가신 후, 아버지는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도 집으로 돌아오시는 법이 없다



*시집, 사라지는 것들, 현대시학








그 길 - 조영민



길이 없어지고 몸 안으로 새길이 난다
그 길 속에서 길을 찾는다


휴일이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어른이 아이가 되는
사내아이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좌판이 되고 밤나무 그늘 밑의 노인이 되는
그 헛기침을 배워가는 불혹의 길


부대 복귀 시간을 잃고 다방 곁에 서성이는
이등병 같은 나이, 때로는
시골 낡은 굴뚝의 철사를 조이기 위해
한밤중 일어나 마른 물만 벌컥벌컥 마시는 아버지 같은,
몸속의 방들이 참 많은 나이


문들이란 문들은 다 닫아버리고 온통 창문만 열어놓는
몸의 야산으로 깊숙이 더 들어가 땅을 파고 묻을 게 많은
거대한 공동묘지를 거느린 나이
묻으면 무서워서 죽을 때까지 파보지 않는 나이


고양이만 묘지 위를 킁킁거리고 다니다
달빛을 물어뜯어 파리만 어지럽게 날고 있는
잃을 게 없는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시시때때로 자꾸만 흔들려서 아름다운 나이
다시 오지 못할 나이로 제대로 아는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