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망초와 쑥부쟁이와 폭설 - 오창렬

마루안 2019. 12. 21. 22:43



망초와 쑥부쟁이와 폭설 - 오창렬



사랑은 만남과 이별 사이의 일이라지지요


우리 만났던 봄날 이후 당신을 이별하지 않았으니 나는 사랑 안에 있고 나를 만나러 오지도 이별하지도 않는 당신 또한 그러하니 당신은 늘 거기 계세요


사랑 가운데라면 지극함만으로도 꽃은 피어 마음 복판에는 안개꽃처럼 간절간절 망초꽃 피고 그 뒤로 조금은 슬픈 빛으로 쑥부쟁이가 피어나느니 추체할 수 없다는 듯 이따금 폭설 내리기도 하느니


눈 녹은 하늘에는 백목련도 첫사랑처럼 둥둥 피어오른다지요



*시집, 꽃은 자길 봐주는 사람의 눈 속에서만 핀다, 모악








세월 - 오창렬



애인은 늘 멀리 있어
우리는 밤새 편지를 쓰거나
새벽을 기다려 첫차를 탔다
단지 그가 사는 하늘 아래 서보고 싶어
마음이 먼저 풍선처럼 떠갔다


사랑는 안부가 궁금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


저 느린 걸음으로도 달팽이가 길을 나서고
어떤 사람들은 물속을 들여다보느라
물가에 서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길은 애인 쪽으로 구불거리고
해와 달은 번을 갈아 길 위에 복무한다
그 해와 달 세월을 이루었으니
내 아들이 사랑을 아는 나이가 되면
가만히 있으라, 하지 않겠다
세월이 비추는 길을 따라 떠나라
나뭇잎 사이라도 물속이라도 찾아가라 하겠다


주먹 큰 이들이 길을 막고 있는 동안
바위처럼 캄캄하게 가라앉은 세월이 길다
세월호처럼 세상은 캄캄해졌다


우리가 멀거니 손차양을 하고
먼 파도소리에도 귀가 쫑긋해지는 건
애인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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