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울한 시계방 - 서화성

마루안 2019. 12. 22. 18:49

 

 

우울한 시계방 - 서화성


전자 상가를 지나면 간판이 없는 시계방이 있다
환갑이 넘었을까, 그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신문을 읽는다
등이 가렵거나 심심할 때는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한동안 습기가 밀려올 때면 와르르 몇 개의 동전이 쏟아진다
오늘의 날씨는 바람이 잠잠해지면 자장면을 먹을 수 있을까
시계 초침과 소주병이 일렬종대로 기다린다
초하루에 끊었던 담배가 구석진 바닥에서 뜨끈하다
한때 그는 특기가 뭐랄까
질리도록 들은 FM 89.9에서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올까
적성이 맞지 않는 김밥을 저기요, 여기 김밥 곱빼기요
한때의 우울과 한때의 웃음을 버무린 저녁 어디쯤에서
기다리던 버스는 답장처럼 오지 않는다
우울할 때 심장이 뛴다는 걸 알았고
웃을 때 통증이 튀어 나온다는 걸 알았고
꽁초를 피우던 박 씨가 리어카를 밀었다 끌었다 한숨이다
그럴 때면 어제 마신 시간을 가득 붓는다

 

 

*시집/ 당신은 지니라고 부른다/ 산지니

 

 

 

 

 

 

해가 진다 - 서화성

 

 

태엽시계를 보거나 만져 본 적이 없었다

바람이 두 번 지나가면 아침인 줄 알았고

민둥산에 해가 지면 내일인 줄 알았다

주름살이 느는 것과 슬픔이 같다는 걸 알았다

호락호락하게 하늘과 마주한 적이 없었고

얼굴을 들어 겸상한 적이 없었다

흙먼지를 탁탁 털며 하루가 가는 줄 알았다

햇빛이 쨍쨍해야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과

호미질이 익숙해질 때 밥이 익어간다는 걸 알았다

숫돌은 칼날이 부드러워야 자기 몸을 내어준다는 것을

기억 한 뭉치가 빠져 세상이 보이지 않는 날,

초승달처럼 허리가 잘록하다는 걸 알았다

막차를 기다리는 삼산면 판곡리 낡은 정류소

무거운 발걸음을 지고 남은 담배를 문다

바다에 갔다는 막내가 해가 지는 곳에 있는지

한숨이 늘어났다는 것을

그렇게 어디서부터 또박또박 오고 있었다

 

 

 

 

# 서화성 시인은 경남 고성 출생으로 2001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버지를 닮았다< <언제나 타인처럼>이 있다. 제4회 요산창작기금을 받았다.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