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흐린 하늘이 더부룩하여 - 김이하

흐린 하늘이 더부룩하여 - 김이하 흐린 하늘이 더부룩하여 느지막이 점심을 먹는다 포장된 김 하나 뜯어 옆에 놓고 입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릴 삼키며 가만 마음이 젖어드는 점심을 물 한 모금에 쓸쓸함 한 점 얹을 때 봄기운이나 쐬자고 열어놓은 창 밖에서 마늘 싹 같은 소리 올라온다 오랜만에 새소리보다 높은 아이들 소리를 옥타브 꼭대기서 듣는다 천국의 소리, 나는 들었던가 더부룩한 속이 쑥 꺼지는 그때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홍제천 1 - 김이하 -행촌동을 떠나며 한 뼘 햇살로 십 년을 살고 아스팔트 검은 먼지 닦으며 삼천 날을 새고 행촌동 반지하 방을 떠나 까치집 짓듯이 덜렁 삼층에 올라앉아 세상 보니 더없이 빛나는 하루였다 시장길을 따라 내려가 순대국도 먹어 보고 막거리 한 사발에 취해도 보고 ..

한줄 詩 2020.03.09

봄이라 불리운 남자 - 김남권

봄이라 불리운 남자 - 김남권 젖은 장작 냄새가 난다 그가 오고 있나 보다 포실 포실한 흙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아궁이에선 벌써 불 냄새가 한창이다 그는 불을 품고 있다고 했다 강원도 산골에 산다는 그는 한여름에도 불이 좋다고 했다 그는 계영배를 구울 때처럼 생의 마지막에 스스로 만든 아궁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막걸리 사발 하나를 구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지 취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화전민의 유전자 때문이라고 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발가벗고 산으로 들어가 온 산을 불 지르고 그 불 맛을 실컷 퍼먹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고 했다 그는 봄마다 진달래와 얼레지로 정액을 만들고 산을 내려온다 바람 속에서 도끼를 입에 문 장작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드디어 옷을 벗고 그를 맞이해야..

한줄 詩 2020.03.03

요양꽃 - 이주언

요양꽃 - 이주언 나도 복사꽃 같은 풍경인 적 있었네 침 흘리는 내 입술도 한때 사내의 귓불 뜨겁게 했었지 봉긋한 가슴 열어 어린 것의 입에 물리고, 기저귀에 퍼질러진 냄새가 아닌 꽃향기 흘리며 사내의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었지 내 속으로 숱한 바람 불어와 닫힌 물관부 건조와 뒤틀림으로 훼손된 몸의 장치들 사이에서 기억이 헛돌고 밤낮이 바뀌고 혼자 닦지 못하는 배설에도 식욕은 떠나지 않아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통로 쪽으로 발을 뻗어 이어가는 목숨들 요양 꽃병 속에서 끝물의 목숨 게워내는 일은 참혹에 가까워 내 안의 물 바닥이 뿌옇게 드러나는 시간 보호사의 손길 아래 말라가는 살가죽 아직 게워내야 할 무엇이 더 남은 것인지 생이 바닥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네 소지를 태운 재처럼 나의 생, 가볍게 날..

한줄 詩 2020.03.03

사양 꿀 - 성봉수

사양 꿀 - 성봉수 낡은 도꼬리를 걸치고 길을 나선다 늘어진 주머니 안에서 나를 꼼지락거려도 네게 내줄 것이 없다 고래 그물이 되어 버린 가난의 주머니 오늘로 돌아와 도꼬리를 벗는데 절망과 포기의 그물 칸칸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과 코와 입술과 잔잔한 웃음 바랄 것 없이 내게 채워 살아, 봄 햇살 아래 서게 했던 그해 내 검은 겨울 안의 너 *시집, 바람 그리기, 책과나무 침을 발라라 - 성봉수 고갈된 난자 맘이 더 이상 고이지 않는 가랑이를 벌려 다가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네 안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침이라도 발라야 했다 그리움의 독을 박박 긁어 여름 한낮 운동장에 날리는 흙먼지처럼 목이 타도록 침을 발랐다 달거리를 잃은 여인네는 전설 같은 오르가슴의 기억을 잡고 밤새 허리를 꼬며 안달하였으..

한줄 詩 2020.03.02

햇볕에 임하는 자세 - 배영옥

햇볕에 임하는 자세 - 배영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햇볕들이 지구별에 왕림을 하는가 양지공판장 앞 옹기종기 모여앉은 할머니들 무릎 위에 달랑 얼굴 하나씩 올려놓고 공손히 햇볕을 맞이하고 있다 영정에나 어울릴 법한 흑백사진들이 웃는다 잘 여문 호두알 같고 이리저리 엮어놓은 실타래 같다 입가에 새겨진 주름을 잡아당기면 곡진한 생애가 한 말쯤 술술 풀려나오겠다 한평생으로 풀지 못한 고통의 매듭들을 햇볕에라도 녹여 달래려는 심산인가 그림자에 물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땅이 꺼지는 줄도 모르고 햇볕을 영접하고 있다 빈 몸뚱어리 가득 노을을 쟁여넣고 있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 배영옥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

한줄 詩 2020.03.02

지른다는 것 - 이무열

지른다는 것 - 이무열 이십 년 넘게 꾸려온 '박가분朴家粉' 문 열자 마자 오늘은 꾀죄죄한 입성에 예사롭잖은 표정의 할머니 한 분 들어선다 ​ -몸이나 방에도 뿌리는 향수 하나 보여 보소 내한테 몸 냄새 쿰쿰하다는 그 짠한 말 차마 우짜겠노 지나 내나 영세 아파트 달셋방 주제에 다닥다닥 붙어 천날만날 싸울 수도 없고 -불가리나 버버리나 랑방 같은 향수가 좋긴 한데, 이런 건 보통 사오만 원씩 하는 겁니다 -그기 뭐꼬? 이름을 잘 모리겠는데 쫌 더 헐코 좋은 건 없으까 장개도 못들고 나이든 아들헌테 백인 냄새야 삭일 수 없다 치고, 이래봬도 젊은 날 혼잣몸 되어 칠십 평생 깨끗코 정하다는 말 들어 왔구마 -할인을 많이 해서 싼 건데 처음 보신 이것도 좋은 겁니다 -그라마 사장님이 좋다 카는 거 함 지를 텡..

한줄 詩 2020.02.29

세월아 네월아 - 고증식

세월아 네월아 - 고증식 횡단보도 건너는 바깥노인 둘 이차선 육 미터 도로를 세월아 네월아 한나절을 건넌다 속도를 멈추고 기다리는데 그제야 차를 본 영감님 하나 뒤를 향해 어여어여 팔 내두른다 손짓은 요란한데 몸은 그대로 목숨이 받쳐준다면 어김없이 또 만나야 할 모습일 터 때가 되면 한여름 노을 내리듯 나도 저렇게 저 길을 건널 것이다 쓸쓸함 뒤에 따라오는 기다림 바라느니 느려진 발걸음 따라 마음도 저리 느려질 수 있었으면 *시집, 얼떨결에, 걷는 사람 목욕탕에서 - 고증식 미라가 다 된 아비 곁에 초로의 사내 구석구석 중풍 든 몸 씻긴 뒤 펄렁거리는 몸 보물인 양 앉혀 놓고 토닥토닥 온몸 두드려 로션 발라준다 땀방울 뚝뚝 떨궈대는데 눈부셔라 활짝 핀 검버섯과 반쯤 벗겨진 아들의 반짝거리는 이마 아들의 ..

한줄 詩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