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벽과 등 사이에서 - 조미희

마루안 2020. 3. 3. 19:30


벽과 등 사이에서 - 조미희



사람은 벽을 앞세우고 살아갑니다


가끔 힘센 사람을 꿈꾸지만

늘 소시민입니다


벽을 넘는 순간 도둑 아니면 혁명입니다


어느 날 벽 같은 사람을 만나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나도 누군가의 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나도, 누군가가 항상 그리운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은 내가 본 동물 중 가장 단단하고 물렁한 벽입니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벽입니다

벽은 양면성, 안쪽과 바깥,

벽 한쪽은 분명 반동입니다


밥벌이는 위대한 벽이지요

밥도 높은 밥, 낮은 밥, 장미가 핀 밥, 철조망 걸린 밥이 있습니다

밥상을 펴 놓고 버킷리스트를 써봅니다

종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입니다


퇴근길에 검은 봉지마다 벽을 사 들고 온 저녁,

네 개의 든든한 벽, 어느 곳을 기대도 밀어내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기댈 수 있는

기름때 묻은 등이 있습니다



*시집, 자칭 씨의 오지 입문기, 문학수첩








맷집 - 조미희



맷집은 맞으면서 단련되는 것이라면

주먹을 이해하는 자세로 맞이할 일이다


매를 맞을 때마다

울지 않았다

아픈 곳이 너무 많아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몰랐다

매가 쌓이면 훗날 울음이 될 거라고

코치는 말했지만

그땐 정말 아픈 곳을 모른 체했다

내게는 피해야 할 주먹들이 즐비했다

멍든 곳을 보며 아름다운 환상을 꿈꿨다


한쪽 눈으로 울었고

이젠 등으로도 운다


허술했던 허점이

지금도 훅을 날리고 어퍼컷을 올려친다

현실성 없는 표를 손에 쥐고

일주일 달걀을 굴리며

퉁퉁 부은 간을 다독인다


결정적 한 방은 늘

초조한 곳으로 들어왔다

이후 그곳들은 약점이 되었다


맷집 속, 주먹들은 이동한다

뼈를 타고 가혹한 말을 타고

여전히 내 체급과 매치를 벌이려 한다






# 곱씹으며 읽지 않아도 금방 이해가 되는 시다. 여성 시인임에도 피 터지는 밥줄 세상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밥값과 사람값은 자기가 매길 수 있지만 시값은 독자가 매긴다. 눈으로 읽어도 좋고 조용히 낭송하며 읽어도 입에 착 감긴다. 잘 쓴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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