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른다는 것 - 이무열

마루안 2020. 2. 29. 19:02

 

 

지른다는 것 - 이무열


이십 년 넘게 꾸려온 '박가분朴家粉' 문 열자 마자
오늘은 꾀죄죄한 입성에 예사롭잖은 표정의 할머니 한 분 들어선다

-몸이나 방에도 뿌리는 향수 하나 보여 보소 내한테 몸 냄새 쿰쿰하다는 그 짠한 말 차마 우짜겠노 지나 내나 영세 아파트 달셋방 주제에 다닥다닥 붙어 천날만날 싸울 수도 없고
-불가리나 버버리나 랑방 같은 향수가 좋긴 한데, 이런 건 보통 사오만 원씩 하는 겁니다
-그기 뭐꼬? 이름을 잘 모리겠는데 쫌 더 헐코 좋은 건 없으까 장개도 못들고 나이든 아들헌테 백인 냄새야 삭일 수 없다 치고, 이래봬도 젊은 날 혼잣몸 되어 칠십 평생 깨끗코 정하다는 말 들어 왔구마
-할인을 많이 해서 싼 건데 처음 보신 이것도 좋은 겁니다
-그라마 사장님이 좋다 카는 거 함 지를 텡께 그거 한 분 줘 보소 지처럼 남방 놈인지 서방 놈인지 하고 자개농은 없다만 호락호락 내내 무시당코야 우예 살겠습디까?

저 헛헛한 쇳소리의 그늘엔 꽃댕기 팔랑대던 유년의 고무줄놀이와 혼인색 가을날 노란 은행잎 빛깔의 풍경이며, 무전취식처럼 먹성 좋은 그리움의 향기로 감싼 노래까지, 다복 다복 외롭고 가난한 날의 펜글씨 같은 시절 인연들 죄다 깃들었거니

잠시 잔손금 많은 한때의 왕년을 잊어버리고, 고쟁이 속 꼬깃꼬깃한 만 원권 두 장 곰삭은 속내인 양 군내 나는 세상의 허공 그 너머 어디론가 종주먹질하듯 찌부드드 펴지고 있었다


*시집, 묵국수를 먹다, 문학세계사


 

 



신랑감 있습니다 - 이무열


영상통화로 맞선을 보는
마흔세 살 경주 최씨의 꽃피고 싶은 봄날
베트남 땅 스무 살 신붓감은 한껏 수줍기만 하다

-안녕하세요?
하고는 할 말 없어 서먹한데
-아가씨 우리 며느리 꼭 좀 되어 줘요
옆에서 시어머니 자리의 달뜬 목소리가 필사적이다

흠, 흠
컴퓨터 앞에서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눈만 똥그란 표정의 신붓감에게
철공소밥 손톱밑 기름때 나이 차도 보이지 않는가 보다

백 년 전 이 땅에도 사진 하나 달랑 들고
하와이로 사탕수수밭으로 살러간 신부들 있었다는데
스무 번
서른 번
마흔 번도 더 외로웠던 최씨에게는
신혼살림 차리겠다고 장만해 둔 아파트가 십 년도 훨씬 넘었단다

허구한 날 연애 하나 못하고
저 등신 머저리 같은 놈!
시어머니 자리의 닦달과 늙은 푸념이 늘어질수록
팔려오는 듯한 신붓감에게 차마 못할 짓만 같은데

습관처럼 만나는 일요일
오늘도 아리랑호텔 커피숍에는 물 좋은 아가씨들로 넘쳐날 것이다
등불 하나 켜들지 않고 하늘나라 신랑만 기다리는


 


# 이무열 시인은 대구 출생으로 2010년 계간 <유심> 시 부문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이전에 1996년 <대구일보>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었다. <묵국수를 먹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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