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월아 네월아 - 고증식

마루안 2020. 2. 28. 19:31

 

 

세월아 네월아 - 고증식


횡단보도 건너는 바깥노인 둘
이차선 육 미터 도로를
세월아 네월아 한나절을 건넌다
속도를 멈추고 기다리는데
그제야 차를 본 영감님 하나
뒤를 향해 어여어여 팔 내두른다
손짓은 요란한데 몸은 그대로

목숨이 받쳐준다면
어김없이 또 만나야 할 모습일 터
때가 되면
한여름 노을 내리듯
나도 저렇게 저 길을 건널 것이다

쓸쓸함 뒤에 따라오는 기다림
바라느니
느려진 발걸음 따라
마음도 저리 느려질 수 있었으면


*시집, 얼떨결에, 걷는 사람

 

 

 

 

 

목욕탕에서 - 고증식


미라가 다 된 아비 곁에 초로의 사내
구석구석 중풍 든 몸 씻긴 뒤
펄렁거리는 몸 보물인 양 앉혀 놓고
토닥토닥 온몸 두드려 로션 발라준다
땀방울 뚝뚝 떨궈대는데
눈부셔라 활짝 핀 검버섯과
반쯤 벗겨진 아들의 반짝거리는 이마
아들의 손길 따라
아비는 다시 사람 얼굴로 돌아온다
오종종한 아들의 비루먹은 몸 어디에
저리 둥근 마음 숨어 있었을까
무심한 아비의 눈동자
산 너머 저쪽 물들이고 있다



 

# 고증식 시인은 1959년 강원도 횡성 출생으로 충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한민족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환한 저녁>, <단절>, <하루만 더>, <얼떨결에>가 있다. 밀양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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