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햇볕에 임하는 자세 - 배영옥

마루안 2020. 3. 2. 18:56

 

 

햇볕에 임하는 자세 - 배영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햇볕들이
지구별에 왕림을 하는가

양지공판장 앞 옹기종기 모여앉은 할머니들
무릎 위에 달랑 얼굴 하나씩 올려놓고
공손히 햇볕을 맞이하고 있다

영정에나 어울릴 법한 흑백사진들이 웃는다
잘 여문 호두알 같고
이리저리 엮어놓은 실타래 같다

입가에 새겨진 주름을 잡아당기면
곡진한 생애가 한 말쯤 술술 풀려나오겠다

한평생으로 풀지 못한 고통의 매듭들을
햇볕에라도 녹여 달래려는 심산인가

그림자에 물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땅이 꺼지는 줄도 모르고
햇볕을 영접하고 있다

빈 몸뚱어리 가득 노을을 쟁여넣고 있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밥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 배영옥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안다고들 한다
그 말이 단순히 숟가락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천명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숟가락들
어제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가시고
건넛집 아이 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다

나도 이제 상 위의 숟가락에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수저통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숟가락을
상 위로 옮기는 가벼운 노동을
아직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킨다
몸과 생각에 물기가 많은 아이들은
죽음과 생의 신비가 숟가락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따닥따닥 말발굽 소리를 내며
아이는 상 위에 숟가락을 식구 수대로 가지런히 놓고 있다
눈대중으로 숟가락 숫자를 헤아려본다

가장 귀중한 숟가락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잃었다


 

 

# 배영옥 시인은 1966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 문예창작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뭇별이 총총>이 있다. 2018년 6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는 그의 1주기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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