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하늘이 더부룩하여 - 김이하
흐린 하늘이 더부룩하여
느지막이 점심을 먹는다
포장된 김 하나 뜯어 옆에 놓고
입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릴 삼키며
가만 마음이 젖어드는 점심을
물 한 모금에 쓸쓸함 한 점 얹을 때
봄기운이나 쐬자고 열어놓은 창 밖에서
마늘 싹 같은 소리 올라온다
오랜만에 새소리보다 높은 아이들 소리를
옥타브 꼭대기서 듣는다
천국의 소리, 나는 들었던가
더부룩한 속이 쑥 꺼지는 그때
*시집/ 그냥, 그래/ 글상걸상
홍제천 1 - 김이하
-행촌동을 떠나며
한 뼘 햇살로 십 년을 살고
아스팔트 검은 먼지 닦으며
삼천 날을 새고
행촌동 반지하 방을 떠나
까치집 짓듯이
덜렁 삼층에 올라앉아 세상 보니
더없이 빛나는 하루였다
시장길을 따라 내려가
순대국도 먹어 보고
막거리 한 사발에 취해도 보고
오래 걷던 인왕산길 버리고
한강까지 닿는다는 길을 따라
몇 시간 흘러도 가보고
청둥오리 왜가리도 쇠백로도 해오라기도 잉어도
모두 수줍어 돌아서는데
청둥오리 병아리들이 푸르르푸르르
봄을 몰고 오는 하루
여기서 또 십 년을 보내도 좋겠다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그냥, 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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