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바닥이라는 나이 - 박남희

바닥이라는 나이 - 박남희 물속 깊이에서 별을 볼 수 없듯이 내 바닥이 안 보여 내 바닥이 아파 자꾸만 무언가 출렁거려 내 바닥이 불안해 그래서 종종 행복해 쉰이 넘은 나이를 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닥아, 나를 말할 수 있니 바닥만의 생각으로 바닥만의 몸으로 나를 지탱할 수 있니 내 그림자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하던 바닥이 태양이라면, 너무 뜨거운 태양이라면 나는 태양에게 말해야겠네 식은 내 사랑도 종종 태워달라고, 내 바닥 위에 네가 서 있네 누군가 너를 꽃이라고 말하네 언젠가 스러질 꽃, 그래서 슬픈 꽃, 그러나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꽃 그래서 내 바닥은 불안해 내 바닥은 아파 내 바닥이 안 보여 세상에 흙이 없는 바닥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내 바닥은 때로 너무 물렁물렁해 *시집/ 아득한 사랑의..

한줄 詩 2020.07.15

기억의 맹점 - 이주언

기억의 맹점 - 이주언 아버지의 시선이 초점을 잃었다 깊은 구덩이처럼 나를 향하던 눈빛마저 지웠다 아버지 저를 보세요! 나 보여요?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 시선을 안으로 향한다는 것 지난 삶을 들여다보는 일일까 밥상을 엎던 옛날로 되돌아가 젊은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참회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독하게 먹었던 마음이 흔들린다 따뜻한 기억은 지워버리고 어둠만 남긴 나의 반쪽 기억이 아버지 생의 초점을 잃게 만든 것일까 *시집/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 한국문연 능소화 - 이주언 뒤척일 때마다 출렁, 멀미가 난다 병실에는 낡은 배들이 떠 있다 담장의 안쪽에서 날아든 나비를 품었던 아버지 가슴 바깥으로 고함소리 만개하던 날 아들은 훌쩍 담을 넘어 좁은 골목을 지나 먼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푸른..

한줄 詩 2020.07.09

무심함에 대하여 - 이서화

무심함에 대하여 - 이서화 원주 중앙시장 골목, 전을 부치는 솥뚜껑은 어쩌면 저렇게 무심한가 메밀전 배추전 미나리전 감자전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 묽은 반죽 속에 고작 배춧잎이나 파 몇 대궁이 그 얇은 한 장의 힘인 것을 한참을 서서 지켜보았다 고도의 기술이란 다름 아닌 단순하게 손 놀리는 무심함이라는 것 진동하는 냄새의 끝엔 무심한 손끝이 붙어있다는 것 찢어지지 않게 얇게 부치는 기술에도 한쪽을 익히고 그 익은 쪽의 힘으로 뒤집는 일 모난 곳 없는 동그란 모양 파치도 없이 부쳐내는 여자의 근심 한 장이거나 산전수전 끝의 달관이다 전 부치는 냄새는 문득, 이라는 말 오래된 식욕을 불러오는 냄새 근처엔 비 내리는 날의 처마 밑 기름 끓는 소댕이*가 있다 들러붙은 힘으로 익거나, 또 잘 뒤집히는 ..

한줄 詩 2020.07.09

식탁에 수저를 올리는 일 - 박일환

식탁에 수저를 올리는 일 - 박일환 어둠이 안개처럼 부드럽게 밀려오는 저녁 무렵이어야겠다 식탁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놓는 일로 세상의 소란함을 잠시 덮는 동안 힘겨웠던 하루가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식탁은 풍성하지 않아도 불평을 모르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오랜 습관처럼 나란히 자신의 옆을 내어줄 뿐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몫이었으니 오늘 누가 목구멍 깊이 울음을 삼켰는지 묻지 말기로 하자 다만 식탁에 수저를 올려놓듯이 경건한 마음만 간직하기로 하자 당신의 부어오른 손등을 가만히 끌어당기는 저녁 무렵은 아무래도 저 가지런한 숟가락과 젓가락 위로 가여운 한숨처럼 스며들어야겠다 *시집/ 등 뒤의 시간/ 반걸음 슬픈 현대사 - 박일환 그녀의 발꿈치에 반했다는 말 거짓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늘씬..

한줄 詩 2020.07.09

불온한 꿈 - 황원교

불온한 꿈 - 황원교 저 붉은 봉숭아 꽃잎 으깨어 열 손가락 물들이듯 내 생애 한 철만이라도 너를 그렇게 물들일 수 있다면 저 붉은 봉숭아 꽃잎 으깨어 열 발가락 물들이듯 내 생애 전부를 너와 그렇게 함께 살 수 있다면 아, 널 생각하면 입안에 절로 침이 고여 방금 잘 여문 사과 한 입 깨문 것 같고 수밀도(水蜜桃) 한 입 덥석 베어 문 것 같기고 하고 샛노란 밀감 한쪽 슬쩍 떼어먹은 것 같은 널 그리워하면서 생겨난 불온한 꿈들이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 오르는 가을 오후 낮에는 해를, 밤이면 별을 헤는 해바라기처럼 오롯이 너를 위해 피어나는 꽃이라면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가시 돋친 자의 일상 - 황원교 햇살 쏟아지는 아침마다 무수한 금빛 화살에 꽂힌 나는 한 마리의 황금 호저처럼 느릿느릿 ..

한줄 詩 2020.07.08

흐린 날에 갇혀 - 윤의섭

흐린 날에 갇혀 - 윤의섭 기후엔 늘 예민하였다 가령 일기 예보라는 가장 새롭고 비인위적인 뉴스에 끌리는 것인데 간빙기를 사는 운명은 시한부에 익숙하다 화창한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날씨를 상징으로 만든 건 샤머니즘도 신비주의도 아니다 겨울은 고난 봄은 희망 눈보라는 시련 단비는 쾌락 날씨에 인간사를 빗대 놓고 우린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항상 바뀌는 날씨는 사람의 일생과 닮았으므로 다만 언제 끝날지 모르고 끝없을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질 때 길고 긴 슬픔의 장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찰나라도 영원한 듯 저미는 이별의 혹한을 사는 중이거나 메마른 가뭄의 땅을 맨발로 걸어야 하는 절망이 이어질 때 어떤 날씨는 죽어서야 바뀐다 그러니 깨지지 않는 상징은 죽음에 가깝다 며칠을 자고 일어나도 두꺼운 구름에 뒤덮..

한줄 詩 2020.07.08

그 곳 - 김윤배

그 곳 - 김윤배 그 곳은 함께 했던 지상의 모든 지점이었으니 너, 그 많은 지점을 이어간 마음의 색깔을 어느 페이지에 기록하게 될지 너, 속의 내가 머물던 지점은 언제나 저물녁이다 그 곳에 눈 내리고 북풍 사납다 내가 홀로 머물던 유배의 낯선 지명, 그 곳 까마귀떼 날고 지금은 오로지 슬픔 일렁이는 낡은 지명, 너에게는 기억되지 않는 유폐의 장소 그 곳에 달빛으로 써내려간 너의 내간을 묻고 오는 나를 내가 아프게 본다 가슴에 묻어도 될 일이었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암각의 새 - 김윤배 백련 피었다 내게 돌아올 살은 경계 너머 돌 속에 박혀 백년이다 돌 밖으로 나가 산맥을 넘고 싶었던 검은 새가 풍화에 들어 천년이다 그렇게 사라지는 영혼을 백련의 흰 빛에 묻는다 백련이 수척..

한줄 詩 2020.07.08

걷는 사람 - 우남정

걷는 사람 - 우남정 저기, 그 사람이 온다 두 손을 다른 높낮이로 흔들며 초로의 사내는 필사적이다 해를 바라보고 걷다가 사선으로 걷다가 문득, 역광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어망에 갓 잡힌 물고기처럼 걷는다 두 발이 각각의 각도로 걷는다 걸으려는 사람과 버티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 걷는다 허우적거리는 사람과 춤추는 사람이 함께 걷는다 날개를 말리는 새처럼 우두커니 걷는다 낙뢰가 칼날로 내리친 밤 절개지처럼 무너져 내린 길을 그는 얼마나 오래 걸어온 것일까 기척이 없던 벽조목에 까치 한 마리 울다 간다 너의 왼발과 나의 오른발을 묶고 뛰던 유년의 풍경이 스쳐간다 수직으로 솟는 도시가 지나간다 엇박자 나는 무수한 아침이 걸어간다 하낫! 하낫! 그는 넘어질 듯 일어서며 수평을 흔들고 있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한줄 詩 2020.07.07

다정한 죽음 - 정병근

다정한 죽음 - 정병근 죽은 선배를 문상하고 왔다 그이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생각건대, 먼저 죽은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다는 것 면적스럽게 굴지 않고 꾸역꾸역 살지 않았다는 것 살아서 어질던 그들은 맥없이 갔다 나무처럼 덤덤하고 풀꽃처럼 소박한 삶이었다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은 대로 다정은 가난과 함께했다 모두 자기 것인 양 허기를 꼭 부여안고 쥐 죽은 듯 살다가 병을 얻거나 바퀴에 깔려서 그만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영정 사진의 웃음조차 힘없이 다정하여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시끄러웠다 또 생각건대, 어느 흉악한 시절에 총칼 맞아 죽은 이들도 모두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순한 공포를 눈에 담은 채 그이들의 시간은 멈추었다 삶에 겨워 버둥거리는 내 어깨를 다정하게 도닥여 주었다 *시집/ 눈과 도끼/ 천년..

한줄 詩 2020.07.03

들꽃 - 이우근

들꽃 - 이우근 풀숲이나 기타 경계 모호한 곳에 꽁초처럼 톡, 던져졌지만 한때 뜨거운 꿈도 있었지 절대 바람을 탓하진 않지, 비겁하니까 그러나 땅의 거름도 못 되고 바람의 생체기만 되어 우리, 만만한 얼굴들 하나쯤 제거되어도 표시나지 않지 서로 기대고 뭉개며 존재의 의미를 주무르며 사소한 책임전가로 옹알대는 즐거운 들판 그것이 우리의 생업(生業)이지 어둠이 별의 배후라면 땅은 우리의 막후실력자, 그래, 우리는 부드러운 폭력, 별의 배설물 의미 없는 항거의 나날들, 변두리의 공화국들, 독립이 아니라 폐기되는 소외일지도 몰라, 그래서 찬밥 신세, 하여 꿈의 실크로드를 무단으로 점령하여 자빠지고 넘어지며 무성한 생식으로 대책없이 지평 넓혀가며 일말의 존재감 과시, 나는 없어도 우리라는 평화, 그 무모한 위안,..

한줄 詩 2020.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