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신용불량자 - 백성민

신용불량자 - 백성민 사거리에 우두커니 선다. 길마다 햇살 빛나고 손잡은 웃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어쩌다 그대와 나 숨겨진 이름 하나 가슴에 품었는가? 세상 누군들 눈부심 모를까만 막달바람은 어느 봄을 마중할지 투덕투덕 어두운 골목길 발걸음 뒤로 깨금발 소주병이 뒤를 따른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다시 올 그날 - 백성민 늦은 잠에서 깨어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울 앞에 앉는다. 푸른곰팡이가 세월을 갈아먹었을까? 귀퉁이마다 흰 반점들이 수은처럼 번져간다. 시간의 쉼표마다 탄식은 빠른 물살로 흘러간다. 어디쯤이었을까? 투명했던 시간들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기억들 처진 어깨와 늘어진 살갗들이 몸부림을 친다. 길을 나서야겠다, 오래된 햇살이라도 반겨 맞으려면 *..

한줄 詩 2020.06.18

알약들의 왈츠 - 이소연

알약들의 왈츠 - 이소연 복용지침서를 무시한다는 건 살고 싶다는 걸까 죽고 싶다는 걸까 약을 먹이려고 하면 우는 아이 앞에는 여섯 시간마다 사막이 펼쳐진다 소분된 알약은 하루치의 발자국 같아서 사라지길 좋아하고 글씨들은 자리를 바꾸다 실수를 저지른다 수지 아니면 지수가 새처럼 무관한 봄볕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왈츠를 가르친다 사람들은 내 위로 잠이 쏟아졌다고 한다 분명, 춤을 따라 췄는데 왈츠, 이게 혹시 잘못 지은 약이라면 아이가 뒤바뀌듯 남의 약을 집어온 거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까 봐 나는 자꾸 약을 아낀다 먹지 못한 약이 남아 있어도 나는 호전되고 증상이 다른 사람이 내 약을 대신 먹고 죽는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약사를 사랑하던 사람이 해준 이야기 요즘 약사들은 처방전 없이는 약을 짓지 ..

한줄 詩 2020.06.17

우리의 기억은 서로 달라 - 배영옥

우리의 기억은 서로 달라 - 배영옥 너는 동사서독에서 복사꽃을 보았다 하고 나는 그곳에서 푸른 바다를 보았다 했네 바다는 떠돌이를 부르는 주문처럼 보이지 않는 섬을 옮기면서 이동하고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랑은 영원할까 우리의 희망도 동사서독 필름처럼 다시 재생할 수 있을까 우리의 기억은 모두 다르고 모래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기억은 남은 인생을 어디에 의탁해야 할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천상의 복숭아를 훔치는 동자처럼 기억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기억 또한 나를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랐네 나는 동사서독에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너는 복사꽃 향기에 매혹당한 이십대를 보냈다 했네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이 서로 합치하는 순간은 지금 함께하는 이 순간도 아닐 것이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

한줄 詩 2020.06.16

아득한 내일에게 - 김사이

아득한 내일에게 - 김사이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된 마을 도시 뒷골목에서 싸게 일하는 앳된 이주민 여자들 깡촌에도 가랑비처럼 스며들었다 국내 여자를 사랑하지 못해 반백이 된 동창은 갓 스무살 필리핀 처녀를 사랑했단다 아이를 가졌다고 나를 곁눈질하는 엄마가 사람만 좋으면 되지 않겄나며 중얼거린다 맞아요, 사람만 좋으면 되는데 사람이 사람이고 또 사람이 사람이라고 논밭을 팔고 몸을 팔고 절망을 팔아서 아이가 파랑새를 찾으러 떠날 수 있다면 노동이 죽은 땅에도 다시 씨앗을 심을 수 있다면 다민족 아이들이 다국적으로 고르게 자라날 텐데 인간의 피는 색이 없었을 것이다 지구가 태어나면서 돌고 돌아 서로의 고통 속으로 스며들어 빚어낸 오색 빛깔 다채롭고 찬란한 색들로 채워진 선물 같은 세상 오리라는 상상 너..

한줄 詩 2020.06.15

여름나무 아래 - 조현정

여름나무 아래 - 조현정 가장 가까운 전생이 왜 이리 먼가 바람이 슬어놓고 간 햇살 뒹구는 씨앗 한 줌 삼키고 바깥마루에 누워 나무 한 그루 낳았다 나무는 쿨럭이며 엄동설한 뒤 찾아온 봄을 끌어안더니 여름 꽃을 좋아하는 여자와 입을 맞추었다 저녁 바람에 뿔질하던 나무는 어둠이 오길 기다려 목을 풀고 별 나비 불러모아 화음을 연습했다 당신은 어디만큼 왔을까 까치발로 선 나무는 자꾸만 화장실에 먼저 가고 싶고 가사는 하나도 외워지지 않았다 망가진 자전거 끌고 돌아오는 옛집 여름 나무 아래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은빛 목화 세레나데 *시집/ 별다방 미쓰리/ 북인 별다방 미쓰리 - 조현정 ​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 좁은 계단을 오르면 흘러간 드라마처럼 껌을 짝짝 씹으며 까만 속눈썹 울려붙이는 그녀가 있지 커다란..

한줄 詩 2020.06.12

도착 혹은 도착 - 윤의섭

도착 혹은 도착 - 윤의섭 이 길로 고래가 지나갔다 안쪽으로 휜 가로수들 곧장 걸으면 다다른다고 했다 담장에 그려진 벽화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입 모양에도 솔깃하여 어느 문설주에 걸린 풍경 부르는 소리에도 혹하여 가다 보면 아까 들어선 길목 봄꽃 피었던 화단에 국화가 담겨 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는지 모른다 담장을 돌아서면 커피 향 그윽한 카페가 수줍은 듯 앉아 있다 고래가 묵어 간 해안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수천의 사계가 한꺼번에 흐르고 있거나 달이 묻혀 있을 것이다 이 길을 찾아 나서려면 알고 있는 길을 모두 버려야 한다 도착은 결코 돌아서지 못하는 중독 수없이 가 본 적 있어도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불치 섬이나 국경이나 수목 한계선을 넘어선 철새들이 다시 수목 한계선을 향해 날아야 하듯 너에..

한줄 詩 2020.06.11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 한승원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 한승원 토굴 뜨락의 욱 자란 철쭉나무 우듬지를 자른다 꽃이 화려 찬란하다는 오만처럼 우주를 온통 제 꽃만으로 장식하겠다는 탐욕처럼 헌걸찬 그들의 세력지, 무엄한 그들 군락 속에 토굴 주인의 번뇌 너울처럼 자생한 찔레나무와 산딸기와 쇠무릎과 모시풀과 팽나무와 억새풀 띠풀의 줄기들, 초여름 들어 미친 듯이 들솟는 죽순도 자른다 올곧음과 실바람 한 줄기에도 소곤거리는 푸른 물 뚝뚝 듣는 중얼거림과 낄낄거림과 창문에 비치는 수묵화 같은 그림자를 즐기려고 장려한 솜대나무가 토굴 주인을 압박하는 괴물이 되어 있다 서재의 방바닥과 바람벽 사이에서 죽순 하나가 식인종의 창처럼 들솟은 적이 있었다 덧거친 겁박 속에서 토굴 주인이 살아가는 것은 싸움이다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한줄 詩 2020.06.10

전생에 두고 온 - 김인자

전생에 두고 온 - 김인자 숨을 헐떡이며 야트막한 언덕에 닿았다 붉은 사막 가운데 거짓말처럼 바위산이 우뚝 서있고 뒤편엔 소금호수가 눈처럼 빛났다 뜻밖이었다 모래언덕 정상에는 더벅머리에 수염 덥수룩한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동그란 얼굴 하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가지 말라 애원이다 뭉그러진 얼굴이 안타까워 마른 가지를 꺾어 눈과 눈썹을 만들고 오뚝한 콧날과 입술도 그렸다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듬직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거친 머릿결 쓸어주며 외롭더라도 잘 지내라며 토닥토닥하고 돌아서는데 오 이런, 낯이 익다 초면이 아니다 누구시더라 누구시더라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춘몽(春夢) - 김인자 신기루 격렬 뒤 적막 이 세상에만 있는 계절 산을 넘고 둑을 범람해..

한줄 詩 2020.06.09

흑백 추억 - 최서림

흑백 추억 - 최서림 낡은 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첫사랑 사진 한 장, 빛바랜 편지지에 싸여 있다. 마른 장미 바스락거리는 향기가 난다. 이사 다닐 때마다 몰래 숨어 내 방에서 사십여 년을 동거해왔구나! 꿈속에서처럼 조금도 늙지 않았으나 마른 장미같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세상 안으로 꺼내면 금방 바스러질 것 같아 낡은 편지지에다 곱게 다시 싸서 내 몸 가장 깊은 곳에다 숨겨주었다. *시집, 사람의 향기, 시와에세이 감꽃처럼 - 최서림 무심코들 밟고 지나가는 감꽃을 보면 감꽃 같은 엄마가 아슴아슴 떠오른다. 박수근의 아낙네들처럼 눈에 띄지 않게 살다 간 엄마 생각에 내 생(生)이 젖어온다. 해는 길고 시락죽도 떨어진 날, 감꽃을 주어주던 애잔한 얼굴로 막내를 잊지 못해 꿈으로 찾아온다. 아기 배꼽보다 작..

한줄 詩 2020.06.09

산색 - 손택수

산색 - 손택수 산등성이의 신록이 등성이 너머로 번진다 산빛이 산을 벗어나서 공제선 너머 무한으로 산을 넘치게 하는 것 같다 번지는 산빛으로 하여 산이 흔들흔들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저 색을 뭐라고 불러줘야 하나 능선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색, 있는데 틀림없이 없는 저 빛깔, 툇마루 끝에 나앉아 해종일 앞산을 보고 있던 노인의 말년이 마냥 적적기만 한 것은 아니었겠다 가만히 앉은 채로 저를 넘어가는 넘어가는 산빛 떠나온 들판을 쓰다듬으며 쓰다듬으며 온다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응달 - 손택수 그늘이 만든 위성, 스란치마 스적이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안에서 감꽃 목걸이를 한 계집아이, 우물을 울림통으로 지하 깊숙이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실로폰 소리를 내는 물방울이 뚝뚝 수면을 두드리고 ..

한줄 詩 2020.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