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개망초 - 조성순

개망초 - 조성순 깊은 산 속 너른 공터 개망초 꽃들 웅성거리고 있다 수천 송이 수만 송이 동무 하고 산 속의 오후를 고즈넉 밝히고 있는 모습 가슴이 서늘해진다. 저 개활지는 한때 사람들이 공들여 농사짓던 터전 농사짓던 사람들 밭이랑에서 너를 보면 재수 없다고 뽑아서 멀리 팽개쳤으리라 억척같은 놈들이라고 둔덕 밖으로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개망초는 눈치 보며 슬금슬금 둔덕에서 개활지로 시나브로 발걸음으로 옮겨놨을 것이다. 살아 보자 할께 살자 엉금엉금 기었을 것이다. 농사꾼들 하나둘 삶의 터전을 도회로 바꾸거나 주소지를 다른 별로 옮긴 뒤 개망초들 슬금슬금 둔덕 넘어 촛불 하나씩 들고 점령지를 밝히고 있다. 벌 나비 불러 모아 잔치를 열고 있다. 사람들이 떠나간 공터 자신들의 의지로 공화국을 만들어 ..

한줄 詩 2020.06.28

저녁의 푸른 유리 - 이정훈

저녁의 푸른 유리 - 이정훈 널 어디서 본 것 같다 쏘가리 삼촌이라 불렸지 쏘가리 애인이라 했고 파란 물 들어라, 새잎 피고 덤불 시들 때 쑥 뜯어 수경만 헹궜다 친구들은 물 밖에서 군대에 가고 결혼하고 아이들은 물엣것처럼 자라지 바위 그늘 돌무더기와 굴속에서 빛나던 살빛을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삽날 같은 꼬리 끝으로 무얼 하는지 알지 물 위에 똬리 틀고 둥둥 떠내려 가는 것도 보았어 돌 이불 떼어 쓰고 겨울잠 자던 물고기들의 처마 떠내려간 흔적을 메우며 떠내려온 바위 밑을 흘러간다. 내 강물, 투신하는 눈발처럼 빗방울처럼 아이들 흔적 없고 친구들과 애인들은 아프거나 바쁘다 이젠 아무것도 잡지 않을 거라네, 물은 깊고 해는 일찍 져 강변에 돌처럼 박혀 쏘가리를 생각하시게 면도날 아가미와 열세개의 등 ..

한줄 詩 2020.06.27

마침, 뻐꾸기가 운다 - 이강산

마침, 뻐꾸기가 운다 - 이강산 옥천읍 삼청리 삼청저수지 지나 문 닫은 향수 한우 공장 마당 죽은 나뭇가지에 산비둘기 두 마리 앉아 비를 맞는다 비는 마침 장맛비, 홀로 우뚝한 나무 곁은 나무처럼 텅 비었다 지나가는 전깃줄이 전부다 장맛비가 전깃줄인 줄 알고 날아오르다 전깃줄에 걸린 참새 한 마리가 전부다 저만치 맞은편 덤불 속에 개복숭아 나무가 숨어있긴 하다 장맛비를 피하다 넘어졌는지 온몸이 붉다 나는 나를 우산으로 가리며 복숭아 곁을 지난다 산비둘기와 참새와 전깃줄이 요지부동으로 힐긋거리는 눈치가 뻔하다 나를 지켜보겠다는 심산이다 참외밭이며 까투리를 그냥 지나쳤는데, 내가 개복숭아 따위를? 나는 개복숭아밭 언덕 위 산방 꽃집의 다섯 자매가 복숭아를 좋아할까, 백일 지난 다섯째의 젖병에 복숭아즙을 섞어..

한줄 詩 2020.06.27

쓸쓸한 말 - 김형로

쓸쓸한 말 - 김형로 멀리 있는 벗이 전화를 했다 어떻게 지내냐 안부를 묻고 무심한 세월 탓도 하고 그냥저냥 지나간 청춘의 일 그리워 니가 오든 내가 가든, 한번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듯 카톡 사진으로 근황을 훔치다가 니가 오든 내가 가든, 게으른 약속 생각나 내가 전화를 했다 목단꽃 하나 들면 니가 거기 있었다고 그 말 전하고 싶었는데... 오가지 못한 그 사이 습관처럼 굳어진 쓸쓸한 말 니가 오든, 내가 가든... 그 사이에 꽃이 말없이 졌다 *시집/ 미륵을 묻다/ 도서출판 신생 대꽃이 피면 - 김형로 칸마다 손님을 태우고 어느 별로 갔을까 누구는 꽃을 두고 백 년이다 육십 년이다 하고 길조다 흉조다 해도 분명한 것은 꽃은 피었고 열차는 떠났다는 것 하도나 그곳은 멀기도 해서 죽어도..

한줄 詩 2020.06.23

역설적 유전자 - 정진혁

역설적 유전자 - 정진혁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유전이 아닐까 나는 '희미한'이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희미한은 내 DNA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셔도 희미했고 빨랫줄에 널린 색 바랜 팬티처럼 모든 약속도 희미했다 11월 봉숭아 물든 손톱처럼 누가 욕을 해도 희미했고 누가 돈을 떼먹어도 희미했다 색을 잃어버린 백일홍 꽃잎처럼 아버지 때문에 슬플 일은 없을 것이다 희미한 아버지 희미한 유전자 덕분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나도 사람들은 저녁연기처럼 기억하지 못할까 그러나 너무나 희미해서 또렷한 아버지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판 아버지의 한 연구 3 - 정진혁 안방은 기울기가 심했다 10도쯤 아랫목 쪽으로 경사가 졌고 구슬을 놔두면 아래쪽으..

한줄 詩 2020.06.22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 - 김두안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 - 김두안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꽃이라고 부른다 나는 꽃을 꺾어 해안에 던진다 새들이 눈썹처럼 돌아와 차갑게 우는 것은 아직도 불빛을 향해 배 위를 달려가는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등대라고 부른다 나는 불빛을 꺾어 바위에 던진다 새들이 침묵을 물고 바위 속에 제 그림자를 접어 넣는다 말갛게 씻긴 발을 들이고 신열에 떨며 몸을 웅크린다 새들이 눈을 감고 바라보는 낡은 부리에는 어느 백랍 같은 영혼의 냄새가 묻어 있다 새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안식처라고 부른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새를 기다리기로 한다 어두운 심연에서 떠오른 안개가 바위를 삼키며 해안을 점령한다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던 검은 배가 뱀이 우는 소리를 내며 부두에 닿는다 안개 속에서 폐허가 된 마을로 ..

한줄 詩 2020.06.22

비 몸살 - 조성국

비 몸살 - 조성국 저걸 무어라고 해야 하나 유유히 지느러미 살랑거리는 버들치 연못 밖으로 냅다 튀어나와 땅바닥 쳐 대는 걸 무어라고 해야 하나 하늘 한쪽 검기울고 아등그러져 갑작비 품은 날에는 멱 붉고 등이 검푸른 새 기울기 삐딱한 마당 스치듯이 날랜 곡예비행을 하는 거나 무수히 제 몸을 쳐서 공중에 고정시키던 때까치 급강하해 낚아챈 버들치 급소를 탱자 가시에 꽂아 쪼는 걸 무어라고 해야 하나 그 뉘한테 배운 적 없어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거먹구름 속의 비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저걸 나는 다만 본래부터 타고난 천성으로 여기지만 그저 욱신욱신 쑤셔 대는 뼈마디를 다독거리며 다들 비 몸살 앓는다는 엄니의 단호한 말에는 아무런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문학수첩 동정 여인숙 - ..

한줄 詩 2020.06.21

불안한 인연 - 박미경

불안한 인연 - 박미경 엄마다 나만 보면 웃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고 슬프기 그지없는 나의 엄마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던 여인 몇, 엄마였다 슬픈 엄마는 부지런한 남편을 만나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생은 너무나 짧았다 떠난 뒤 일 년도 채 안 돼 거처가 있던 여인 작정하고 덤볐고 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안방에 누웠다 모든 잠든 밤, 집은 나 대신 울적해졌다 밥그릇 씻는 소리 요란해지자 아버지는 붙잡기 위한 술책으로 위채 기둥을 뽑아 주었다 아주 잠깐 웃음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헛마음만 열어놓았다 닫았다 했다 그 후 뿌리째 뽑혀 나간 여러 개의 기둥에는 무수한 오해들이 달려 나왔다 뭔 일 없는 것처럼 뭔 일은 늘 벌어져 있었다 와중에 오래 머물다 떠난 이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 캄캄한 긴 ..

한줄 詩 2020.06.21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 조항록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 조항록 미끄러질까 걷다가, 한 번쯤 나를 잊었더라면 사물들이 형상의 고통을 잊고 쓰임새만 남기듯 한 시절 그윽하게 나를 불태우기만 했더라면 망설일 것이 뭐라고 서성거릴 것이, 두리번거릴 것이 허정거리는 밤거리가 뭐라고 하얀 뼛가루처럼 순결했던 나의 무지(無知) 그걸 알아, 두 눈 질끈 감았더라면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옛 노래 - 조항록 진작 잊은 줄 알았는데 입에서 맴도는 멜로디 내가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게 언제였더라? 열아홉 살의 지하 음악다방에서는 바깥의 햇살을 몰랐지 한순간 세상에 꽃들이 만발할 줄이야 사뿐히 한참 낙엽이 쌓여 세상의 길들을 쓸쓸히 용서할 줄이야 네가 떠나고 벌써 여러 번의 계절이 이승의 굳은살을 도려냈는데 나는 그 노래를 잊지 못했던 것..

한줄 詩 2020.06.19

하루의 감정 - 김정수

하루의 감정 - 김정수 한결같이 당신은,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한다 베란다의 아침은 뜨겁거나 푸르거나 지나치게 높아 눈 익은 풍경은 살, 풍경의 잔영 눈에서 서걱거리는 뒷모습이 빠르게 반짝거리면 남은 슬픔 선뜻, 서툴고 말없이 아침을 식별한 손과 손의 간격, 그 간극은 사과만큼 벌어지고 포장지를 벗겨 씻지 않고 먹는 아사삭, 밖에 나가도 안을 걱정하는 당신은 나무의 전생을 닮았다 길가 대신 물가에 서있던 비릿한 미루나무 물고기가 거꾸로 처박혀 파닥거리는 듯한 등의 지느러미쯤 앉아 있던 새 떼가 일제히 비늘을 털면 물 머금은 구름이 빠끔거리고 낚시라는 소일거리는 소류지에서 영혼을 말리는 일 봄을 꿰어 한가한 겨울을 낚는 저녁 6시 30분, 당신을 기다리던 불안은 은밀히 먼 곳을 응시하고 어둠은 노을과 노..

한줄 詩 2020.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