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정한 죽음 - 정병근

마루안 2020. 7. 3. 22:15

 

 

다정한 죽음 - 정병근

 

 

죽은 선배를 문상하고 왔다

그이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생각건대, 먼저 죽은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다는 것

면적스럽게 굴지 않고

꾸역꾸역 살지 않았다는 것

살아서 어질던 그들은 맥없이 갔다

나무처럼 덤덤하고

풀꽃처럼 소박한 삶이었다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은 대로

다정은 가난과 함께했다

모두 자기 것인 양 허기를 꼭 부여안고

쥐 죽은 듯 살다가

병을 얻거나 바퀴에 깔려서

그만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영정 사진의 웃음조차 힘없이 다정하여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시끄러웠다

또 생각건대, 어느 흉악한 시절에

총칼 맞아 죽은 이들도

모두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순한 공포를 눈에 담은 채

그이들의 시간은 멈추었다

삶에 겨워 버둥거리는 내 어깨를

다정하게 도닥여 주었다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안점(眼點) - 정병근

 

 

어둠과 그것은 관련이 있다

조짐이라 해야 할까

무렵이라 해야 할까

어스름이 내릴 때 그것은

내 허기의 변두리에 분포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표정이 온다

 

수족관 속 오징어의 눈이 무섭다

백색 촉광 속에서 들끓고 있는

진화의 히스테리를 본다

잡아먹을 것인가 잡아먹힐 것인가

식욕과 그것은 관련이 있다

 

벽화처럼 눈에 검은 테두리를 친

여자가 하는 술집을 알고 있다

그 여자의 눈을 맞고 오면

희박하던 기억이 좀 더 뚜렷해진다

세월과 그것은 관련이 있다

 

컴컴한 안이 밖을 보고 있다

모든 표정의 전위이면서 배후인

어머니 별은 여전히 터지는 중

멀어지면서 집중되는 어둠의 표면에

간판 불빛들이 붐빈다

 

쓸쓸함과 그것은 관련이 있다

눈을 감아도 끝내 나를 바라보는

눈이여, 무섭고 쓸쓸한 안점이여

바라보면 충혈이 오는

유정한 혹성에 당신과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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