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딱딱하고 완고한 뼈 - 김대호

딱딱하고 완고한 뼈 - 김대호 뼈를 만진다 손목뼈를 만지고 광대뼈도 만진다 내 형식을 완성한 뼈의 굴곡이 내 근황이다 손가락 몇 개가 뼈의 굴곡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내 안의 습곡을 찾아다니는 일보다 뼈를 만지는 일이 쉽다 쉬우면서 금방 진단이 나온다 너무 딱딱한 걸 숨기고 있구나 문어같이 기어다니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이 뼈의 완고한 구조가 불만이구나 유치가 찬란한 한낮 새가 날아간 도로 쪽 허공에 손가락을 펴 대보았지만 손가락뼈는 탁본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있는 흰 뼈들의 상세한 근황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확인했다 동면에 들어간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웃고 발랄하고 찡그리고 헛되었는데 그 일체가 동면 중에 꿈꾸는 사건들이었다 깨어나기에 적당한 기온이 찾아왔을 때 내 뼈의 배열은 ..

한줄 詩 2020.07.23

성북동에게 - 최성수

성북동에게 - 최성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으라 자본과 개발의 밀물 속에서도 그대 거대한 도시 서울에 홀로 서 있으라 마을 밖에서는 재빠르게 변화의 시간이 흐르고, 탐욕이 집을 삼키고 마을을 삼키고 마침내는 인간마저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시대 작은 골짜기 손바닥만 한 동네로 멈춘 듯 그대 서 있으라 비탈과 골목과 이웃이 어울려 빚어내는 낡은 것의 아름다움을 그대, 간직한 채 남아 있으라 하나쯤은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하나쯤은 세상과 멀치깜치 떨어져 살아가는 것도 있음을 그대를 통해 느끼리니 오래 그대로 견디며 서 있으라, 성북동이여 *시집/ 물골, 그 집/ 도서출판 b 성북동 산 3번지 그 집 - 최성수 그리운 것은 모두 두고 온 그 마을에 있으니, 성북동 산 3번지 비탈길을 오르면 나는 세..

한줄 詩 2020.07.23

내 뒷모습 - 허연

내 뒷모습 - 허연 다른 사람 카메라에 찍힌 내 뒷모습을 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필 왜 그때 너는 하얀 부표처럼 천변에 서 있었는지 왜 하필 장마였는지 또 수년이 흐른 오늘 쏟아지는 비를 보며 생각한다 왜 하필 그날 절룩거리는 운명이 송곳니처럼 내 목을 죄어왔는지 취중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눈 끝이 뜨거워지는 나는 이생에서 또 이렇게 상스럽다 체머리 흔드는 벌을 받으며 왜 또 술잔을 받아 드는지 두 시간째 빗줄기를 바라보며 자꾸만 생각한다 운명이 어느 순간을 만들었고 그 순간들이 내 오랜 뒷모습이 됐음을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슬픈 버릇 - 허연 가끔씩 그리워 심장에 손을 얹으면 그 심장은 이미 없지. 이제 다른 심장으로 살아야 하지. 이제 그리워하지 않..

한줄 詩 2020.07.23

늦기 전에 - 나호열

늦기 전에 - 나호열 오늘의 운세에 운명을 즐기면 근심이 없다고 적혀 있다 기쁨은 슬퍼하지 않을 때 찾아오고 사랑은 미워하는 마음을 버릴 때 저절로 가득 차는 것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오늘의 손님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어 오늘을 맞이하면 슬픔도 나그네일 뿐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미움을 잊어버리면 오늘의 운세는 늘 운명을 즐기면 근심이 없다 *시집/ 안녕, 베이비 박스/ 시로여는세상 안녕, 베이비 박스 - 나호열 안녕 이제 떠나려 해 혹한과 눈폭풍 속에서도 서로의 황제가 되었던 짧은 며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부화를 꿈꾸는 돌을 닮은 생명 난 뒤돌아보지 않아 이제 저 푸르고 깊은 바다로 갈꺼야 나의 몸부림이 멋진 자맥질이라고 오해하지는 마 봄이 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우리는 만날 수 있을..

한줄 詩 2020.07.22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 이원하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 이원하 말 그대로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가을이 서러워서 그랬다 바다는 하늘을 가졌고 때때로 네 얼굴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저 빈 섬에 몸담은 유일한 슬픔이었다 글이 책에 묶여 있는 것처럼 숲에 묶여 있는 유일한 슬픔이었다 언제 흘렸는지 모르는 네 얼굴을 바다 표면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혼자 있어야 발견될 수 있는 슬픔이었다 혼자 있어서 발견된 질문도 하나 있었다 섬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나 답을 허공에 부탁했을 때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므로 내 나름대로 생각해야 했다 생각은 가꿔도 칙칙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기적은 없었다 기적을 바라지 않으니 참을 것도 없었다 빛을 비춰볼 것도 없었다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

한줄 詩 2020.07.22

붉은 날의 가계도 - 정훈교

붉은 날의 가계도 - 정훈교 핏물처럼, 낙하하는 신음을 본다 (당신은 그것을 노을이라 했고, 절정이라고도 했다) 쓸 수 없는 것들과 이미 쓴 것들과 써질 입술이 포개어져 침대를 뒹굴었다 이 새벽에도 지지 않는 당신의 분홍 입술은 자작나무를 닮았다, 베어 물면, 물컹, 터지는 붉은 신음, 그 어디에도 없을 하얀 무덤 하얀 무덤 긴 통로를 지나, 웜홀과 두 개의 무덤은 행성 K098로 이어지는, 또 다른 流星 무너지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당신의 갈비뼈는, 밤새 지문에도 닿지 않던 붉은 사막을 추억한다. 가르강튀아를 겨우 빠져나와, 제 홀로 별이 된, 나와 당신의 그, 붉은 가계도 *시집/ 나는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시인보호구역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있다 - 정훈교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

한줄 詩 2020.07.21

겸손한 유신론 - 김형로

겸손한 유신론 - 김형로 다른 곳은 몰라도 사막에서만큼은 분명 신이 있는 것 같다 생명이 있을까 싶은 그곳에 신은 한 동물을 그의 설계대로 살게 하셨다 여닫이 콧구멍과 지방을 저장하는 등의 혹, 널찍한 발바닥에 별을 읽는 천리안, 가시마저 씹는 맷돌 같은 혀와 입 신은 고행의 수도자를 고해의 사막에 살게 하셨지만 낙타는 원망 대신 무릎을 땅에 매일 꿇는다 그것도 고마운 목숨이라고 누군가가 저 자신을 만든 후 저를 위해 저 끝없는 사막을 펼쳐 주셨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낙타 앞에서 나는 겸손한 유신론을 읽는다 *시집/ 미륵을 묻다/ 신생 늙은 사자 - 김형로 대학병원 수납 창구 앞 얼굴에 저승꽃 만발한 노인이 옆의 아내에게 소리를 지른다 다른 사람은 돈 있으니 수술하는 거지! 꿈쩍 놀란 눈총들이 일제히 ..

한줄 詩 2020.07.20

철 - 이소연

철 - 이소연 나는 여섯 살에 철조망에 걸려 찢어진 뺨을 가졌다 철을 왜 바다 가까이 두었을까? 눈을 감고 바다를 들으려고 바람을 따라갔다 피가 나는 뺨을 받아왔다 아무도 나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잠을 잤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지린내가 심장까지 따라왔다 철을 왜 바다 가까이 둘까? 그 둔중한 말을 왜 그땐 왜 눈을 감지 않았을까? 무얼 가지려고 갈라지는 물 다시 아무는 물 꿰매지 못한 뺨 철을 바다 가까이 두는 게 더는 이상하지 않았다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사람 철 5 - 이소연 터미널 뒤에서는 몸을 팔 수도 있다 곧 떠나는 사람들이 깜박하고 놓고 갈 수 있는 옛날 슬픔은 왜 썩지 아니하고 상품이 되었나 철 기둥이 떠받치고 있던 상점 안에서 백인 남자 셋이 맥주를 마실 때..

한줄 詩 2020.07.20

다황을 긋다 - 이무열

다황을 긋다 - 이무열 마지막 다황공장 경상북도 의성의 '성광'을 아는가 한때, 전국에 공장이 삼백 곳 넘었고 최초로 세워진 곳은 인천의 '대한'으로 일제 땐 한 곽에 쌀이 한 되였다는데 몰래 훔쳐가곤 했던 탓일까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그런 ,얼치기 군가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젖히곤 했다 인천의 '대한'이나 부산의 'UN'도 어느덧 문을 닫고 먼 바다 나가는 뱃사람 부적이나 곰방대 끼고 살던 외할머니 신주단지 같던 다황, 까맣거나 빨간 두약(頭藥) 알맹이 푸르른 불꽃으로 일렁거리던 고등학교 시절 만홧가게 골방을 들명날명 뻐끔담배 배우곤 했다 오지 않을 누군가 그리워 죽치던 맹물다방 사이먼&카펑클이나 애니멀스를 신청하고는 3층, 5층,..

한줄 詩 2020.07.19

분꽃 - 김왕노

분꽃 - 김왕노 나는 분꽃을 할머니꽃이라 부른다. 봉투에 할머니꽃이라 쓰고 해마다 서랍에 갈무리해 두면 다음 해에 마당에서 담 밑으로 동네 경로당 앞으로 할머니 걸음걸이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서 핀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서랍의 분꽃 씨앗에서 할머니 숨소리가 웃음소리가 후렴구처럼 살아나 내 겨울 독서는 즐거웠다. 손녀를 치장해 주듯 각색의 꽃으로 세상을 곱게 치장해 주는 할머니 마음 겨울 깊어도 서랍 속에서 까만 씨앗으로 잠들어 있었다. 여름 내내 그 많이 피었던 꽃을 지우산처럼 안으로 접고 캄캄한 서랍 속에 곤히 잠든 할머니 꽃씨 분꽃 씨 생각만 해도 볍씨 몇 말 잘 갈무리해 둔 것같이 마음이 넉넉해졌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이젠 아득하나 올해도 할머니 모습이 건강하게 분꽃으로 송이송이 피..

한줄 詩 202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