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마네킹의 법칙 - 천융희

마네킹의 법칙 - 천융희 몇 달째 부동자세인 텅 빈 점포 창고 대 방출을 거쳐 막다른 고별세일에 다다르면 결국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마네킹의 법칙이 있다 최후의 각도로 끝까지 버티고 있는 환한 침묵 차마 접지 못하는 저들의 표정을 보라 머리 팔다리며 허리 결국, 분해되어 뒤엉킨 채 트럭에 실려 나가는 그들의 시간이 도래한다 쇼윈도에 나붙은 임대가 가까스로 성립되면 일손을 갈아 끼우고 또 다른 각도를 꿈꾸는 그들의 세계 사지 멀쩡한 저들끼리 뭉쳐 웅성거리는 아예 길가로 내몰린 마네킹들 사이로 어렴풋이 사라지는 사람들 그인지 저인지 알 길이 없는 *시집/ 스윙바이/ 한국문연 달의 폐곡선 - 천융희 말하자면 밤의 척추처럼 주상복합 아파트를 돌며 점점 커지는 붉은 몸뚱어리 최저시급을 수거하는 그의 직무는 무분..

한줄 詩 2020.07.02

왼손이 집을 나갔다 - 한관식

왼손이 집을 나갔다 - 한관식 호된 질책도 매질도 없었지요 그날은 여느 날처럼 평온했고 반찬투정 없이 밥 한 공기를 가뿐하게 비운 모습에서 별다른 낌새는 느끼지 않았어요 가만, 그러고 보니 약간은 의도하지 않는 곳에서 덤벙대는 모습을 보긴 했지요 가령 악수할 때 나서는 소소한 질투에서부터 팔씨름에서 오른손을 밀치고 앞장서거나 사인을 해야 할 각인된 자리에서 대뜸 볼펜을 집어든 따위 눈짓으로 제지를 물론 했었지요 그런 것으로 상처를 받았다면 나도 수십 번 상처를 받았겠네요 어디에든 대표선수가 있기 마련인데 물주전자선수가 넘볼 자리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막상 소식도 끊기고 내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으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보고 싶긴 하네요 해서 신문광고 난에 한 줄 올렸죠 '오른손 장갑 줄여 놓았으니 즉시 돌..

한줄 詩 2020.07.02

치부 - 서광일

치부 - 서광일 너는 줄곧 피 묻은 빤쓰 얘기를 했다 다들 해바라기처럼 빤히 보고만 있었다고 보는 사람과 보여 주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날카롭게 뼈마디를 쑤셔 대는지 내게서 반죽 치대는 소리가 났고 끝까지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들을 따라 떼어 낸 수제비 모양 바닥을 굴렀다 한참 저녁들을 먹을 시간에 그러다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죽음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시뻘건 눈물 콧물이 김치 국물처럼 떨어져 결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깨진 반찬통 옆에서 울었고 TV는 깔깔대며 나뒹굴었다 취한 남편이 지쳐 주저앉을 때까지 살이 터져 피가 몽글몽글 솟아도 어디 하나 아픈 줄 몰랐다고 목장교회 삼거리 골목 어귀에서 터진 쓰레기봉투마냥 전봇대에 기대앉아 빤쓰에 묻은 피가 번질까 봐 조각난 옷자락만 여미고 있었..

한줄 詩 2020.07.01

흘러간다 - 김진

흘러간다 - 김진 오늘 만난 택시 기사는 내비게이션을 끄며 눈이 침침하다고 했다 한평생을 길 위에서 살았지만 세 명의 자식은 이국땅에 산다고 백발의 드라이버는 물때가 낀 페트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세월이 닦은 하얀 머리칼이 그의 머리에 가지런히 누워 길을 열고 있었다 저기는 아직 닿지 않은 곳 나는 푸른빛이 도는 마스크를 쓰고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걷고 있을 것이다 저만치 먼저 가는 택시 기사를 알아보면 어여쁜 물통 하나 쥐여주고 그의 벗이 되어 마음보다 먼저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걷고 있을 것이다 간간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세다 차창 밖을 보니 페트병 뚜껑을 닫은 그가 아직은 때가 아니니 창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뿌연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주름을 숨기고 황혼에 이르는 ..

한줄 詩 2020.07.01

중심을 잡는 것들 - 강민영

중심을 잡는 것들 - 강민영 창이 비바람을 긁을 때 자칫 쓰러질 뻔했다 젖은 관절에 집중한 힘은 손바닥 끝에 모였다 막대비가 나무를 때릴 때 매 맞는 수천 개 손바닥은 상상한다 여기서 쓰러지면 나이테가 출렁이고 산길이 휘고 물줄기가 길을 바꾼 자리에 벼랑이 나타나고 바닥은 또 천 길 위로 솟구쳐 오르겠지, 꿇지 않은 무릎엔 섣불리 뿌리가 자라나고 굽은 허리가 멍든 이파리를 말린다 너는 내 앞에서 멧집을 키웠고 나는 네 뒤에 숨어 버티기만 했다 가끔은 뿌리가 뽑힐 듯이 흔들려야만 중심을 잡는 것들이 있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모자 - 강민영 차가운 바닥에 앉은 남자가 모자에 더러운 동전 하나 넣고 허공에 피가 도는 걸 경청하고 있다 그는 내 그림자보다 더 짙은 그늘 속에..

한줄 詩 2020.06.30

맛 감별사 - 이철수

맛 감별사 - 이철수 -돈맛 메주 뜨는 냄새가 나네, 어디 상한 꼭지에서 구린내가 난다 뚜껑을 열자 아주 물러진 값이 칠푼이다 오래 묵어서 부패해진 본성인데, 그래도 그렇지, 누가 누룩의 맛이라고 했나 터무니없이 단맛이다 어떤 입은 제 맛을 들키지 않으려고 설익거나 곰삭을 대로 곰삭거나 아예 새까맣게 그슬려서 귀를 닫고 살금살금 어떤 혀로도 읽어낼 수 없도록 불가해한 속내를 숨기기도 하는데 이 은밀한 맛은 그러나, 대단히 직설적이고 절대적이며 독보적이다 이 깊은 맛에 혼을 빼앗기고 몸을 망친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고래(古來)로 그 집 앞마당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수효는 얼마고,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처럼 그 맛에 들려 천국을 파는 사제(司祭)들이 지금도 넘쳐난다니, 가히 구리고 독(毒)하고 쿰쿰한 그 맛..

한줄 詩 2020.06.30

무지개는 왜 북쪽에서만 뜨는 걸까 - 정훈교

무지개는 왜 북쪽에서만 뜨는 걸까 - 정훈교 두 아들의 어미였다가 두 아비의 아내였다가 흔적도 없이 무너진, 그녀에게 밤마다 혓바늘이 돋아납니다 그의 입 속엔 물가자미의 등가시가 자라고 있습니다 월요일엔 붉은 가시가, 목요일엔 다 자란 흰 가시가 손등에 피어납니다 오호츠크해 어디쯤에서 왔다는데 자꾸만 미워집니다 뭍을 떠나왔다는 그의 이야기는 입을 떠나왔다는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에요 촉수에서 돋아난 그녀가 달을 찌르고, 배꼽을 찌릅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물가자미의 등가시는 더욱 환합니다 그믐이 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도통 측백나무 잎 속으로 당신을 밀어 넣는, 그녀에게 *시집/ 나는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시인보호구역 단편소설, 벼락에 관한 못된 편견 - 정훈교 아버지는 첩을 들이셨다 아버지는 ..

한줄 詩 2020.06.29

동굴 - 김호진

동굴 - 김호진 사실은 나이란 놈이 사는 집이다 그렇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동굴을 만드는 일이다 박쥐처럼 웅크리는 일이다 나이 들수록 먹은 음식, 반은 위로 들어가고 반은 이빨 사이 갇힌다 빙하를 닮은 하얀 이빨이 거느린 귀여운 크레바스 속으로, 목구멍보다 어둑하지 않으니 일단 별장이라고 해두자 사실 몸에 생긴 수많은 동굴의 문패는 대체로 조금씩 아프거나 애잔하다 쓸쓸함이란 문패는 발가락이 꼬물거려 오히려 깊은 동굴이 아니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아, 입 벌리고 있는 어두운 동굴들. 소낙비에 숨긴 울음 같이 아득한 구멍, 그 검은 웅크림이 문패다 4억 5천만년 웅크린 양방산 자락 켜켜이 어둠 덫댄 검고 긴 동굴에선 엷은 햇살이 비집어 놓은 언어의 무늬 따라 종유석이 주름치마를 접었다 폈다 아픔처럼..

한줄 詩 2020.06.29

장마의 시작 - 전윤호

장마의 시작 - 전윤호 며칠 구름 모여들더니 결국 비가 내려 함석지붕 아래 쟁여 둔 슬픔은 사막 메기가 되어 꿈틀거리고 내 방은 도굴된 현실이 되었지 농구 골대 하나 비 맞는 공원에서 길 잃은 기억들 웅성거리는데 천둥이 울리고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를 맞아 이별은 죽지 않더군 *시집/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출판 오늘의 택배 - 전윤호 아직 도착하지 않아 외출도 못 하고 있어 검은 비닐로 포장한 오늘치의 불행 혈압약처럼 먹어야 또 하루가 지나가는 이 익숙한 순서 빼먹을 생각은 없어 정량을 초과하지 않으면 당신이 없는 슬픔도 견뎌야겠지 늦은 날을 기다리느라 아무 일도 못 했어 맞을 매는 빨리 맞아야 다른 잘못도 저질러 보지 그러니 가능하다면 아침 일찍 도착해 주렴 저것 봐 또 한밤에 벨이 울리잖아

한줄 詩 2020.06.29

선짓국을 끓이며 - 김옥종

선짓국을 끓이며 - 김옥종 내 지금 끓이는 선짓국처럼 너와의 사랑도 아미노산에 묻혀 거품처럼 뚝배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슬픔은 그 어떤 슬픔을 더해도 흘러넘치지 않던데 말이다 오직 내 슬픔만이 넘치는 것 같던 날 시작은 머물던 별을 떠나 이 행성에 인간의 표피를 가지고 태어나면서부터 남들이 하는 첫울음을 나는 첫 웃음으로 시작했지 심지를 깊게 드리우고 살아가는 것이 숙명처럼 느껴질 때 누르고 눌러서 정제된 슬픔이 정류해낸 보드카로 늑대처럼 토굴에 누워 혈소판에 가두어 놓으면서부터 사랑을 머리에서 심장 쪽으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리움이 종유석처럼 뾰쪽해질 때 횡격막 근처에 머물러 있는 선혈을 찔러 깨우리라 봉분을 파헤치듯이 건드려 깨우리라 네게 이 끓는 피를 해장국으로 내어줄 수 있다면 내 슬픔의 시작이..

한줄 詩 2020.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