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바다상회 - 김요아킴

바다상회 - 김요아킴 바다상회의 주인은 바다다 재생되는 내 기억의 필름 속에서 늘 손님을 맞고 있다 그 한 평 남짓한 자리에서 조수 간만의 차이만큼을 버텨내고 있다 이른 새벽에서 늦은 밤 귀갓길까지 햇빛과 형광등을 달리하며 세월을 소금에 절이고 있는 것이다 뱃고동처럼 우웅거리는 녹슨 냉장고 속은 캔버스의 정물화로 놓여지고, 가끔씩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몇몇의 날갯짓에 바다는 파리채를 흔든다 간혹 누군가 흘리고 간 막걸리는 허연 폐수로 밀려와 좁은 해변을 더 밀어내고 빵 봉지 마냥 부푼 섬이, 납작 바다에 엎드려 자맥질을 한다 저 멀리 뒷산이 파라솔처럼 고운 그늘을 펼치면 반질반질한 계산대 탁자 모서리로 반짝거리는 나의 손때가 더해진다 바다상회의 손님이 바다가 된다 *시집/ 공중부양사/ 도서출판 애지 경계..

한줄 詩 2020.07.18

나무에 걸린 은유 - 전영관

나무에 걸린 은유 - 전영관 내 안의 꽃이 다 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꽃이 보인다 만발해 너울거리는 자태보다 찬바람에 떨어져 낡아가는 꽃잎들이 먼저 보인다 하, 저 꽃잎들은 어미를 잃고 헤맨 어린것의 발뒤꿈치 저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한 청춘 이별을 참다가 뛰쳐나와 진흙 묻힌 버선 바람같이 근본도 없는 것들하고 섞이느라 평생이 한나절인 듯 녹슬어버린 몸 사랑 따위에 발목 잡혀 승천하지 못한 선녀들의 군무 왕자나 기다리는 신데렐라들의 순은 구두 죽을만큼 나른한 저승의 봄을 옮기는 나비 날개 하늘을 연모한 까닭에 나무에 피어난 수련(睡蓮) 삼천배 앞에 미소 짓는 애기보살의 무릎 세상에서 하나뿐인 백옥을 캐다 스러진 광부의 아내 거문고 없이 앉아만 있어도 취하는 기생 손목 이마에 붙이면 지옥도 면하는 부적 ..

한줄 詩 2020.07.18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 가다 - 김인자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 가다 - 김인자 태초에 성전처럼 곱고 순결한 처녀였다 무슨 연유로 집을 나와 험한 산속에서 몸을 파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과도한 향기가 부른 참사일까 함박꽃에는 유독 벌레가 많이 꼬인다 그런 그녀도 피해갈 수 없는 건 시간 순결할수록 때는 쉬이 타기 마련 비밀처럼 세상에 왔다가 피는가 싶으면 어느새 홀로 흐느끼다 시드는 꽃 바닥에 널부러진 터무니없는 추레함 한때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함백이, 함막이, 옥란, 산목단, 천여화, 산목란, 목란으로 개명도 해봤지만 향기만은 어찌해 볼 수 없었을 그녀 어떤 이름보다 함박꽃이라는 이름을 애정했던 나는 7월 어느 날 그녀가 면사포를 벗고 홀연히 사라진 후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 되면 골짜기가 그녀의 향기로 흥건하다는 소문..

한줄 詩 2020.07.17

비석의 출구 - 김성장

비석의 출구 - 김성장 지킬 것 없는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유목의 보폭으로 걸으며 일일이 응대해주기는 싫었지만 나를 가로막는 저 돌의 완고함을 잠시 들여다본다 이미 빈집들만 산다 하는데 비석만 남아 암석을 쥐고 단단해지는 고집이라니 통행증을 요구하듯 위엄을 보이려 하고 사각의 권력은 직선으로 뻗었지만 문장에는 오류가 있었고 변방의 글씨들이 대개 그렇듯 과욕이 획을 지치게 하고 있었다 아마 문(文)을 만든 자와 필(筆)을 다룬 자가 달랐으리라 주어를 놓치지 않으려 머리를 조아린 채 종종거리다보니 서술어는 자신이 비문 밖으로 나가는 줄도 모른다 하긴 어느 시인이 마을에 관여하고 싶으랴 음각의 시간을 파낸 석공도 피로한 망치를 베고 서둘러 잠들었으리라 돌을 세우던 근육들은 허기를 찾아 떠나고 골목길 대문은..

한줄 詩 2020.07.17

수의 - 백무산

수의 - 백무산 다락에서 먼지투성이 가방 하나 찾아내었네 그러나 어디서 얽혔는지 별 기억이 없네 먼지 털어낸 가방 속에 잘 개켜둔 옷 한벌 마치 무덤 속 관 뚜껑을 열어본 듯 팔꿈치는 꽤 낡아 있고 유행이 많이 지났지만 내 옷이란 기억밖에 기억이 없다 이리 저리 뒤적여보지만 언제였는지 어떻게 입은 옷이었는지 어느 한때의 몸을 한껏 꾸미고 그 시절을 걸었을 것인데 두근거리던 시간 위를 걷고 실외의 추운 밤길을 헤매기도 했을 것인데 땀과 눈물을 적시고 어떤 절정에 몸을 떨며 소중한 사람을 안아보기도 했을 것인데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기억이 풀려나오지만 분명한 한때를 삶의 절정이던 한 시절을 나의 모든 것이었을 그 시간에 누추함을 감추고 한껏 품위를 입혔을 것인데 가방 속 지워진 그 시절을 몸은 사라지고 수의..

한줄 詩 2020.07.17

검은 넥타이 - 정일남

검은 넥타이 - 정일남 ​ 나이 먹으면서 검은 넥타이 맬 때가 늘어났다 목에 검은 끈을 매고 집을 나서면 '아저씨, 누구 문상 가사나요' '그래요, 요단강 나루에 앉아 물 구경하다 올 거요’ 공중에서 까마귀가 운다 이상(李箱)은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고 했던가 저승 대합실에 들러 장부에 이름 적고 검은 넥타이가 검은 넥타이를 맞아 인사하고 망자에 대해 얘기하다 밥 먹고 돌아온다 아들들에게 부탁한다 내 가게 되면 검은 넥타이 매지 말라 붉은 장미꽃을 가슴에 달아라 *시집/ 금지구역 침입자/ 넓은마루 우는 소리 - 정일남 부산에서 제주로 가는 카페리호 선상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며 여보게 친구들 남은 인생 잘 살아보시게 나 먼저 가네 그렇게 떠난 시인이 있었다 달은 여울을 건너며 울고 날짐승 떼도 행렬을 이뤄..

한줄 詩 2020.07.17

벼락 새비 젓 - 김옥종

벼락 새비 젓 - 김옥종 이제서야 당신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할 때는 안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생채기가 맞닿아서 덧나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슬픔에게 다가서고자 할 때는 생채기의 반대편을 날이 선 칼로 베어낸 선혈로 가만히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곤히 잠든 당신의 이른 새벽에 동부콩을 넣어 냄비 밥을 짓습니다 토하젓은 없어 별들을 향해 튀어 오르던 징거미 새우를 데치고 쪽파와 달래와 다진 마늘과 간장과 고춧가루로 벼락같이 무쳐낸 새비 젓에서는 당신의 쇄골에서 나던 향유고래의 냄새가 납니다 인연이 저물고 나의 사랑이 발효되지 못하고 골마지 낀 채로 잠들어버린 막걸리 식초처럼 허망한 새벽에 첫 닭이 울기 전 쇠구슬같이 내리는 이슬을 어깨로 받아내며 돌아오는 길에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

한줄 詩 2020.07.16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 손택수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 손택수 누군가 오고 있다 내가 모를 누군가 지나온 거리에서, 잊어버린 여름 강변에서, 더는 가지 않는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 귀에 익은 걸음으로 오고 있다 연못을 치는 빗소리, 웅덩이를 물고기 등처럼 가르고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 소리, 누군가, 이름도 잊어버린 누군가 먼바다 미진처럼 나의 창을 흔들고 있다 거리에서 잠시 부딪친 눈빛, 어디서 보았더라 인파에 떠밀려 돌아선 등, 아는 얼굴인데 만난 적 없는 누군가, 몰라도 알 것 같은 얼굴로 먼산 쪽으로 고개를 빼고 있으면 내 안에서 더 분명해지는 소리 오고 있다 누군가 누군가가 되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강을 건너오고 있다 휑한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아파트 현관 앞 자동 점멸등을 깜박이고 있다 나가보면 아무도..

한줄 詩 2020.07.16

검은 악보 - 박은영

검은 악보 - 박은영 우주가 검은 건 어둠이 아니라고 하지 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부터 콩자반을 좋아했다 머리가 흰, 동네 할아버지들이 무서워 마디 밖으로 다녔지 종이와 눈사람과 가루약이 없는 세상에서 검은 옷을 입고 살았다면, 이라고 쓸 적마다 연필심은 부러지고 나는 혼자 발톱을 깎았다 그것은 그림자를 자라나게 하는 일 흑조를 보고 온 날 마스카라를 사고 까만 눈물을 갖게 되었다 흑해는 아주 먼 바다였지 세계지도를 펼쳐 흑채 한 통을 뿌리면 겨울비가 내렸다 아스팔트는 상습적으로 얼었고 그늘진 당신이 블랙아이스를 조심하라고 했지 말은 깊을수록 검은색을 띠지 까마귀가 되고 싶은 밤들 간혹, 눈을 감고 점이 되기도 했지만 먹물은 차지 않았다 우주는 인간의 손으론 칠 수 없는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손가..

한줄 詩 2020.07.16

금니의 소유권 - 권혁소

금니의 소유권 - 권혁소 남의 살을 조금 더 암팡지게 씹기 위해 금으로 씌워 근근이 버텨오던 어금니를 빼고 티타늄 나사못 두 개를 박았다 두꺼운 거즈를 물려 말 할 수 없게 해놓고 의사와 간호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최소한 한 달은 금연 금주해야 한다고 안다, 혹여 나사못이 턱뼈에 온전히 붙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을 오롯이 환자에게 떠넘기기 위해 단서를 달아두는 것이라는 것쯤 속이 메스껍고 이유 없이 배도 아프다 위암의 전초 증상이 소화불량이라는데.... 별 궁상을 다 떨다가 홈닥터 인터넷에 물어보니 금단 증세란다 통풍을 다스리기 위해 발효 중인 개다래술이라도 한잔 할까 그러기엔 돈 대주는 아내가 너무 무섭다 그나저나 내 돈 주고 씌웠던 금의 소유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노안..

한줄 詩 2020.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