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른 치자꽃을 위한 노래 - 김인자

마루안 2020. 8. 18. 18:50

 

 

마른 치자꽃을 위한 노래 - 김인자


그도 한때는 매혹이었을
꽃 진 자리마다 가득한 향기
밤새 쓴 문장의 파지들이 시나브로 널려있는 책상

떠나기 전 화분에 묻고 왔을 작은 약속 하나
가지를 떠나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도 몸은 땅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와 연락이 끊긴 지 며칠째
피안과 차안을 넘나드는 저 마른 꽃의 잔향
잉여의 시간들

창으로 스민 얇은 햇살이
꽃이 잠들어있는 서재를 기웃댄다

꽃이 꽃다운 건
스스로 눈물을 닦을 줄 안다는 것

그러나 끝내 자신이 꽃인 줄 몰랐기에
꽃일 수밖에 없는 꽃

그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른 채
등 떠밀려온 여리디여린 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꽃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치자꽃이 되었을 것이다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애월(涯月) - 김인자


그러니 가보자 하고 달려간 곳이 애월이다
저 푸른 바다 굽잇길 돌면 무엇이 기다리는지
조금, 조금만 더 가보자 손을 끌었던 건 바람이다

전생에 어느 양반가문의 첩실 이름 같은 애월
정신줄 살짝 놓은 늙은 작부의 이름 같은 애월
물질이 싫어 타관을 떠도는 해녀 딸 같은 그 이름 애월

항구에서 출항을 기다리는 낡은 배들이
서로의 옆구리를 긁으며 시간을 견디고 있다
뭇 사내들이 바다에 몸을 던진 곳
그들을 따라 바다로 간 지어미는 또 몇이나 될까
때 늦은 유채꽃 향기가 부른 그리움 따윈
까맣게 잊고 싶었으나
파도가 애월아 애월아 하고 목을 놓으니
밤이 이슥토록 자리를 뜰 수가 없구나

뭍으로 가는 막배를 고의로 놓치고
갈 곳 없는 나는 방파제에 앉아
저 물가에 찰방거리며 노니는 달그림자를 안고
애원하고픈 마음에 속이 탄다
대체 누가 이토록 애끓는 이름을 지어
열일곱 춘정처럼 내 맘 흔들어 설레게 하는지

애닯고 서러워라
애월이 물가의 달빛이라니

 

 

 

 

# 김인자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 <당신이라는 갸륵>이 있다. 시집보다 많은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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