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동안 - 이운진
돌보지 않은 사과알들이 떨어지고
떨어진 사과알이 썩어가고
그러는 동안
썩은 사과 속 벌레의 집에서 벌레가 태어나고
벌레는 다른 집을 지을 다른 사과나무를 찾아 나서고
그러는 동안
돌보지 못한 내 삶이 사과알처럼 떨어져
가슴속에서 썩어가고
슬픈 것을 너무 많이 보아서 슬퍼진 눈에
세상은 온통 벌레의 집이다
썩은 가슴으로만 얻을 수 있는
오로지 치욕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기에
나는 이토록 많은 하루를 사과알처럼 떨어뜨려야 하는지
저 멀리 다른 땅 다른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고 향기를 머금으며
떨어질 사과를 키우는 건 또 누구의 뜻인지
오늘도 사과나무는 붉은 과즙을 익힌다
나도 외로움의 껍질로 나를 감는다
그러는 동안
이 세상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가득히
햇살이 쏟아진다
사과나무도 나도 반쯤 알아간다
사는 일은 아름답고 공허하다는 걸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흔적 - 이운진
간밤에 작은 짐승이 자고 간 뒤 풀이 눌린 자리
누구였을까
길고양인가, 집 잃은 강아진가, 아니면 다친 새인가
그도 아니면 혼례의 밤을 나눈 쥐였을까
하늘에 보름달이 뜨는 동안
꽃잎이 얇은 꽃들을 피해 둥글게 몸을 말 줄 아는 이
사람보다 눈빛이 한 겹쯤 더 얇은 이
누구였을까
이 세상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도
딱히 오래 있다 갈 마음은 없어서
희미한 냄새와 중력의 무게만 남기는 일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연민을 처음 알게 되거나 별빛을 처음 발견하는 것처럼
얼마나 옳으며 무해한 일인가
내가 이해하고 있던 것보다 더 깊숙이 있는 외로움으로
한 짐승의 체온이 지켰던 하룻밤
나는 세상의 비밀 하나를 끝까지 알지 못한다
# 이운진 시인은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9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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