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픈 영화 - 이철수

마루안 2020. 8. 12. 22:31

 

 

슬픈 영화 - 이철수
-대인동


별들의 고향 지나 영자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 그때 사라진 대한극장 뒷길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맨발의 청춘들이 몇 장, 추억의 찌라시가 되어 침침한 가등 아래 두근두근 암표상처럼 서성이고 있다네
예고편도 없이 너무 쉽게 열려버린 생의 안쪽 문은 다시 잠글 수 없고 얼룩진 꽃무늬 벽지처럼 눅진한 자폐의 얼굴들만 희멀거니 낮달이 되어 떠도는 골목

언제나 밤보다 먼저 찾아온 어둠이 마른 지푸라기처럼 몸을 뒤척이는 살구나무집 쪽방, 때 절은 암막커튼 뒤에서 동시 상영되는 영화, <타임>

어룽어룽 달그림자 아래 푸석하게 빛이 바랜 스카프들이 바닥 없는 낡은 뱃전에 기대어 고단한 날개로 닻을 내린 갈매기 항구 너무 무거워서 빠르게 잠겨버린 생이 스스로 결박을 풀지 못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먼 곳

목울대처럼 캄캄한 골목길 따라 물밀듯 어둠이 내리면 새우등같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밤바다에 하나 둘 집어등을 켜고 정박한 고깃배들, 서로 허름한 어깨를 엮어 가벼운 허기로 출렁이는 이생의 채낚기들, 비 내리는 밤 축축한 타임의 추억을 재생하는 저 비탈진 암벽 위의 따개비들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추억 속, 오늘도 쓸쓸한 웃음 날리며 제 인생의 대사를 주문처럼 달달 외는 영자들의 골목 비 오는 날의 판초우의같이 젖어 있는, 거기
지붕이 없는


*시집/ 무서운 밥/ 문학의전당

 

 

 

 

 

 

내 몸의 중간숙주 - 이철수


누군가 나를 건너가는 소리, 내 몸 안에서 물소리가 난다
내가 눈뜨기 전 태초로부터 건너온 강물 소리

먼저 건너간 사람들의 그림자처럼 강은 끊임없이 그리운 것들을 거느리고 대조기의 욕망으로 나를 거칠게 이끌어간다
생의 지층을 흔들어 쓰다듬으며 격랑과 고요의 불안한 언어로 나를 다스리며 벗어날 수 없는 억겁의 죄(罪)를 고문하며 때론 늑탈하며 극점을 향해 흐른다

내 몸을 흐르는 강의 시원(始源)은 어디였을까

내가 나를 건너야 하는 생멸(生滅)의 중심에 서면 생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어서 차마 눈을 뜨기가 두렵다

종래에는 다다를 피안의 강
눈을 감아야만 생을 가볍게 건널 수 있는 에리다누스*

강은 내 몸의 중간숙주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영혼의 헌정을 위해 싯푸른 바람 속을 요동하며 문 닫힌 에덴을 향해 질주하는, 강은 살아있는 나의 야성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강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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