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보험은 말씀처럼 - 정병근

마루안 2020. 8. 11. 19:38

 

 

보험은 말씀처럼 - 정병근


보험 광고의 예언에 의하면 나는
언젠가는 사고를 당하거나 아플 것이고
그래서 가족들을 고생시킬 것이고
또박또박 예비하지 못한 인생 때문에
살면서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고
그리하여 이래저래
나의 말년은 가파를 것이 뻔하고
이미 내일인 오늘을 후회할 것이고
그것 보란 듯이 나는
불행한 자의 모법이 되어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내가, 내가 아니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죽어갈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해 보지만,
보험은 줄기차게 나의 불행을 입도선매한다
유비무환을 한 귀로 흘린 자
삼가지 않고 섬기지 않은 자
함부로 웃다가 아무렇게나 죽어버리는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선인(善人) - 정병근


보일러가 고장 나서 사람을 불렀다. 노랑머리에 챙 모자를 쓴 청년이 불쑥 들어왔다. 뭐 이런 사람이 보일러를 고친다고, 이것저것 변설이나 늘어놓으며 새 보일러로 교체해야 한다고 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막힌 하수관을 뚫을 때도 세면기와 변기까지 들먹이던 사거리 대한설비 아저씨 생각이 덜컥 났다. 보일러를 제법 아는 사람처럼 상황을 설명하고 옆을 지켰다. 청년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나가 계시라고 했다. 헛기침을 하며 거실을 서성거리는데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물걸레 좀 없어요?" 수건에 물을 적셔서 들고 갔다. "보일러는 아직 쓸 만해요. 이쪽으로 가는 필터 관이 막혔어요. 보이시죠? 이걸 빼서 한번씩 청소해주세요." 청년은 필터에 바람을 쉭쉭 넣고 후후 불더니 걸레로 닦았다. "빗자루도 좀 주세요." 청년은 부스러기를 쓸어낸 뒤 쪼그리고 앉아 때가 새까맣게 낀 바닥을 걸레로 박박 닦았다. 일을 다 끝낸 청년에게 출장비 외에 웃돈 만 원을 더 내밀자 단박에 사양했다. 청년은 주스를 한목에 들이켜고는 뭐라고 뭐라고 전화를 하며 바삐 나갔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유증 - 전영관  (0) 2020.08.12
슬픈 영화 - 이철수  (0) 2020.08.12
소보로빵 - 김옥종  (0) 2020.08.11
날씨는 먹구름을 발표하고 - 김대호  (0) 2020.08.11
침침하다 - 정덕재  (0) 202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