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허공, 근육을 만드는 - 김성장

마루안 2020. 8. 19. 22:12

 

 

허공, 근육을 만드는 - 김성장


남자가 정자의 동쪽에 앉아 있었다 홀로였다
등이 주민증처럼 휘었다
느티나무 잎 하나가 신화의 속도로 땅에 이를 무렵
한 여자가 정자의 서쪽에 와서 앉았다
몇 도쯤 기울어진 시선으로 구절초를 보는 듯했다

남자가 홀로 있을 때 등은 다만 휘어진 주민등록증
곡선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가 등을 맞대는 순간
서서히 허공이 끼어들었다
어느 쪽에서 먼저 근육이 자라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등과 등을 이으며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홀로 남자였을 때 그는 등을 강조하지 않았다
여자가 와서 반대 방향을 보고 앉는 순간
남자가 허공을 향하여 등을 꺼내 보이고
여자는 자기 등을 가지고 와서 거기 앉은 거였다

허공이 두 개의 등을 끌어당겨 근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허공이 왜 나에게 근육을 보여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

내가 근육을 바라보며 참을 수 없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여자가 일어섰다 근육이 파열되기 직전이었다
느티나무 손이 움켜쥔 잎사귀를 모두 놓았을 무렵이었나보다

허공의 기록자로서 묻는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 근육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주민등록증과 구절초 사이에 팽팽하던 근육이 무엇을 비틀었는지
왜 팽팽하게 나의 등을 당기는지


*시집/ 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 걷는사람

 

 

 

 

 

 

우물 - 김성장


우물에 관해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산 아래 동네 사람이 들려준 짧은 이야기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우물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던 목수가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밤마다 우물 속에 숨어야 했다
우물 속으로 내려가 허리쯤 동굴을 만들고
그 속에 애벌레처럼 웅크린 채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가 우물에서 본 것은 자기 얼굴일 뿐이지만
우물 속 비밀을 캐려 했다는 것이 혐의가 된 것이다
물은 땅속에서 솟아 나오지만
하늘도 거기 내려와 머물곤 했던 것
내려가고 내려가면 울퉁불퉁 바닥이 있었다
사람들은 뭃을 퍼가며 거기
하늘과 땅도 조금씩 담아가곤 했다
우물은 스스로 깊어진 것이고
별빛 때문에 더 반짝인 것은 아닐 텐데
목수가 잘못한 게 뭐람
우물 지붕을 만들려 했다는 게 죄라는 소문도 있었다
우물 속에서 길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이 몰려와
아침이면

목수는 등에 피 묻은 상처를 만지며 동굴을 닫아야 했다
목수가 떠난 빈집 뼈마디 사이로 바람만 드나드는 시절
이야기는 뒤란 감나무 아래 주저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물 속에서 흘러나와 사람들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간 이야기였다
집의 기둥마다 곰팡이 슬고 상량문 희미해지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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