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주 - 최성수

마루안 2020. 9. 17. 18:55

 

 

여주 - 최성수


한때 여주에서 늙어가고 싶었다
어린 당나귀 한 마리 벗 삼아
두텁나루에 빈 낚싯대 던져두고
섬강 물살처럼 천천히 흐르고 싶었다
하루 종일 아무도 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에서
이제 나는 고집 센 늙은 당나귀 같은 아내와
낚싯대 대신 앞산 그늘이나 바라보며
멍하니 늙어간다
아내는 고집스레 내 병에 좋다는 여주로 만든 음식을 해낸다
여주에 사는 대신 여주를 먹으며
나는 때때로 오래전 가르쳤던 여주란 아이를 떠올리기도 하고
여주 고을처럼 곱게 늙어가는 법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생은 여주의 맛처럼 지독히 쓰고 조금만 상큼할 뿐이다
그저 그 쓴맛을 달게 받아들이며
남은 세월을 견뎌내는 것,
그 끝에는 텅 비어 고운 노을이 남아 있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올해도 내년에도 여주는 울퉁불퉁 자라다
끝에 곱게 붉어질 것이다


*시집/ 물골, 그 집/ 도서출판 b

 

 

 



예순 - 최성수


곰취 네 포기 산비탈에 옮겨 심고,

배추벌레 서너 마리 잡아주고,

늦도록 웃자라는 하우스 안 잡초 몇 포기 뽑아주고,

하루 사이 발갛게 익은 고추 여남은 따 말리고,

빗줄기 오락가락하는 하늘만 바라보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가을 하루 같은,

나이




# 최성수 시인은 강원도 횡성 안흥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해 성북동에서 살았다. 약 30여 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며 배웠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을 당했다가 복직했다. 퇴직 후 다시 고향 안흥으로 돌아와 얼치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1987년 시 무크지 <민중시> 3집을 통해 작품 발표를 시작했다. 시집으로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 년 전 같은 하루>, <꽃, 꽃잎>, <물골, 그 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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