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을 품은 사내 - 정덕재

마루안 2020. 9. 29. 19:45

 

 

바람을 품은 사내 - 정덕재

 

 

횡단보도를 다 건너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급해도

걸음은 옮겨지지 않는다

지금 출발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마음은 떠났어도

다리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어보지만

아직 하나를 시작하지 못했다

 

거친 사막을 견뎌온 사내

세상을 휘젓던 사내

소주 다섯 병을 마시고

새벽처럼 일어나

바람처럼 달려가던 사내

먼저 떠난 여자가 그리워

밤늦게 울던 사내가 풍 맞았다

바람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한 번 멈춰선 바람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걷는사람

 

 

 

 

 

 

콩나물국밥을 먹으며 - 정덕재

 

 

아침 6시 15분

그쯤이면 새벽인가

콩나물국밥을 기다리는 사내 셋은

깍두기와 김치를 먹으며 사람 얘기를 한다

취기에 오른 남녀 두 명은

철 지난 남자와 여자의 이름을 들춰가며

소수 한 병을 더 주문한다

탁자 위에는 세 개의 술병이 나란히 서 있다

나는 지난밤의 술자리를 복기하며

뜨거운 국물을 식히고 있는데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 대해 떠드는

한 사내의 입에서 밥풀이 튀어나왔다

빈 잔을 내려다보는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으며 술병을 건네고

한 손에는 술병을

다른 한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은 남자는

식기 전에 밥을 먹으라고 말한다

사내들 가운데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하나가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먹은 밥값만 내겠다고 말한다

여자는 한참 전에 식은 국물을 뜨며

반투명의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남은 사내 둘은

악인들에 대한 수다를 이어갔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시인의 말

 

벽에 박힌 못과 책상 앞 의자는 옷걸이였다. 벽에 못을 박은 지 오래됐다. 시가 옷걸이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 함부로 구겨지는 세탁소 옷걸이의 운명 혹은 슬픔일지라도. 매달린 삶은 늘 위태롭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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