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풍이 오는 속도 - 황형철

마루안 2020. 9. 28. 22:05

 

 

단풍이 오는 속도 - 황형철

 


이달 25일 설악산을 출발한 단풍이
광주 무등산에는 다음 달 20일쯤에나 이를 것이라고 한다

백이십 리쯤 될까 자동차로 예닐곱 시간인데
단풍은 부러 산 넘고 물 건너
바위에 앉았다가 구름도 만나고
돌고 돌아 찬찬히 내려온다

너도 단풍처럼 와라
십 리쯤 걷다가 한번 쉬고
또 십 리쯤 걷다가 한번 쉬고
으르렁으르렁 광기의 그것은 냅다 던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툴 것도 없이
기웃거리고 비틀거리고 머뭇도 거려보고
구부정구부정 온몸에 길을 감고
쑥부쟁이와 구절초 감별법도 배워
곰살맞게 말 붙이며 와라
가뿐 산세를 넘는 단풍의 자세도 익히고
물병자리 고래자리 지도 삼아
같은 박동 같은 호흡으로
도처에 흩어진 문장들 나이테처럼 새기며
직립보행으로 와라

단풍도 사람도 매한가지였던 거라
너도 단풍이 오는 속도로 내게 왔다가
돌아갈 때도 그렇게 가라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꽃피는 며칠 - 황형철


일기예보에서 전국의 개화 소식을 보다가
나에게도 벚꽃 같은 일들 많이 좀 생겼으면 한다

서귀포에서 굳이 아흐레나 걸려 북상하는 것처럼
서둘 것 없이 하루에 십 리쯤만 찬찬히 걸으며
호젓한 길과 느슨한 시간의 주인이 되어보고자 하는 것

빈 가지에 솜사탕처럼 만개하듯이
헛헛한 마음 큼직하게 부풀어서
나비와 새 활발히 날아들어
심심한 일 이제 없었으면 하고

당신의 연한 손톱 닮은 꽃이파리
영감(靈感)처럼 지난한 잠을 깨울 것이어서
봄을 보내는 내내 나는
시심으로 호흡하였으면 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잎이 무성해지고야 말듯
어머니의 주름도 썰물처럼 빠져나가
남은 날들의 저녁 위에
가만히 별 몇 개 놓아주고 싶은 것

꽃피는 며칠을 묶어두고서
시무룩한 것들은 잊고
낭창한 벚나무의 자세를 익혔으면 한다

 

 

 

# 봄날, 꽃피는 며칠을 읽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한여름 지나고 가을이 익어 간다. 꽃 진 가지에 녹음 짙더니 쏜살같이 그 잎에 물이 들기 시작한다. 나무의 일생은 피고지기를 반복하건만 한번 간 날들은 돌아오질 않는다. 부쩍 서늘해진 바람에 세월무상을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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