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흘리고 다닌 것들 - 류정환

마루안 2020. 9. 26. 22:08

 

 

흘리고 다닌 것들 - 류정환

 

 

나이 겨우 오십 중반인데

뭘 자꾸 흘린다.

 

반찬을 집어 먹다가도 흘리고

물을 마시다가도 흘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더러는

오줌 누다가도 찔끔찔끔 흘린다.

 

그러고 보니 애늙은이 짓 삼십 년

이것저것 흘리고 다닌 게 전부라!

 

청춘을 흩날리는 꽃잎이라 흰소리를 하며

아까운 줄 모르고 흘리고 다녔지.

풍성하던 머리카락도 알게 모르게 다 흘리고

그 밝던 눈도 속없이 빼앗겨서 본데없이 눈앞은 어둡고

귓속에는 사철 매미가 들어앉아 산 지 오래,

여기저기 술값을 흘리고 다니느라 알량한 주머니 그나마도 비고

야무졌던 꿈은 다 어디다 흘려버렸는지 가슴도 헐렁하고

아, 부질없이 흘리고 다닌 말이며 글들은 또 어쩔 것인가!

 

가뭇없이 흘리고 다닌 것들

저기 어디쯤 저무는 길가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울고 서 있을 텐데

속절없구나, 빈 허물같이 낡은 사내여

이제 그것들을 위해 펑펑 흘릴 만한 것이

오랫동안 참아온 눈물뿐이니!

 

 

*시집/ 말도 안 되는/ 도서출판 고두미

 

 

 

 

 

 

자화상 - 류정환

 

 

작년 다르고 올 다르다는 말,

그 푸석푸석한 신음을 처음 들은 건 내가 아홉 살, 늦깎이로 학교에 발을 들이던 해였다.

 

허리에 담 붙고 무릎 아픈 데 특효라더라,

할아버지는 무슨 풀뿌리를 캐다가 소주에 담가 마시곤 하였다.

세월은 술의 약효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십여 년을 두고 보다가 가망이 없어 보였는지

내가 군에서 제대하던 해 일거에 할아버지를 철거해 버렸다.

 

살던 집이 무너지자 세월은 이내 아버지에게 들러붙었다.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듯 지성으로 세월을 봉양하는 동안

아버지는 이름도 모르는 알약을 한 움큼씩 삼키며 시나브로 고목(枯木)이 되어 갔다.

나무에 물기가 다 빠져나갈 때쯤 세월은 또 거처를 옮길 것이다.

 

작년 다르고 올 다르다는 말,

마흔 해를 몽땅 들어 바치고서야 비로소

그 속절없는 비명에 귀가 솔깃해졌다.

 

 

 

 

# 류정환 시인은 충북 보은 출생으로 충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2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붉은 눈 가족>, <검은 밥에 관한 고백>, <상처를 만지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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