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마루안 2020. 9. 26. 21:58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 김인자


첫 결혼기념일이 이혼기념일이 된 후배의 변은
걷잡을 수 없는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란다
40년을 한 남자와 살고 있는 나도
실은 한 남자와 사는 게 아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호시탐탐 친구의 애인을 넘보고
선후배에게 추파를 던지고 이웃사내에게 침을 삼켰다
단언하지만 이런 외식이 없었다면
나야말로 일찍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결혼제도란, 한 여자가 한 남자만을 거래할 수 있도록 규정지어진 공소시효가 불분명한 합법을 가장한 희대의 불법 사기극, 나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든 망둥어, 위장취업자, 아니 불법체류자, 결혼이라는 기업에 청춘의 이력서를 쓰고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상근봉사자, 가문의 대소사엔 대를 이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식에겐 만료가 없는 무보수 근로자, 

이런 근로조건에서 이 정도 바람 없기를 바란다면
인간이 아닌 건 내가 아니라 후배일 터,
나는 삼류영화,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고
후배는 너무 오래 교과서만을 탐닉한 결과다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추석전야 - 김인자


떨이 과일을 들고 걸음을 재촉하는 남자의 귀가는 북극점에서 열대로 가는 여행 같다 삶이 뭣 같아서 무르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고단한 일상의 얼룩쯤은 차라리 위안이다 낡은 전등 아래 꽃무늬 식탁보를 깔고 남편의 발소리를 기다리는 아내, 골목 안 가게들도 불이 꺼진 시간이니 아이들은 잠들었으려나

좁은 식탁에 봉지를 내려놓자 우르르 굴러떨어지는 과일들, 놀란 사과는 빨갛고 겁에 질린 귤은 노랗고, 추석이 내일이라는 걸 잊지 않은 남편이 마냥 고마운 아내, 늦은 저녁 난데없이 봄 햇살 같은 온기가 집안에 퍼진다 이를 테면 야릇한 끌림 같은 거, 몸을 숙여 식탁 밑으로 달아난 과일을 주우려 할 때 긴 비행 끝내고 드디어 낯선 나라 전망 좋은 호텔방문을 열고 행복해 어쩔 줄 모르는 생애 처음으로 꿈꾸던 곳에 막 도착한 여행자처럼 오랜만에 부부는 눈을 맞추고 아이들 깰세라 입을 막고 킥킥 웃는다 그럴 거야 상상이 부재한 세상은 암흑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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