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현금 인출기 - 전영관

마루안 2020. 10. 23. 21:59

 

 

현금 인출기 - 전영관


판로도 막힌 희망 따위를 양식해보다가
하늘로 방생해버린다
천국의 문 앞에 모여 있겠지만

희망과 가능성은 좌우가 같은 슬리퍼
변기로 걸음을 뗄 때에나 신는 것

하루는 예후도 나쁜 질병
양쪽으로 빤하게 분리될 것 같은
절취선을 따라가는 느낌으로 시계를 본다

불안에 대한 저작권은 없지만
해적판처럼 남용되는 것들이라서 몰수하고 싶다
불면 불운 불쾌 등 돌림자 형제들의 판촉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수면으로 올라와 숨쉬는 고래가 된 것 같다
숨을 오래 참는다면
그리운 사람이 없다는 증거다

부르튼 입술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주둥이가 헐어버린 횟집 수족관 우럭을 떠올렸다
최선을 다해 절망했겠지

다시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먹구름이나 치워주는 일을 하고 싶다
책임지는 것 외엔 무능한 가장이니까
맥락 없는 우환 앞에
신호등 달아놓는 부업이라도 하고 싶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단풍유혼(丹楓幽魂) - 전영관


연속극처럼
신발끈을 고쳐 매주던 사람
몇 년 지난 음악회 티켓을
두 장인 채로 간직한 사람을 기다려요

시월인데 나란히 앉아도 될까요

실없는 약속들을 손꼽다가 붉어지고
의심하다가 단풍나무에 목맨 여자랍니다

계곡 건너 절집 명부전 귀신들도
핏빛에 취해 허공을 날고 뛰는 시절이죠

후회를 집어던지고 애통도 흩어버리고
그대 이마를 산들바람으로 간질입니다
허공에 둔 눈빛의 품이 헛헛하니 양팔로 두르고
곁이 비어서 이렇게 앉았답니다

시틋한 연애는 싫고요
죽고 못 살아 물고 빨고 보채고 징징거리는
뼈가 녹을 정도의 치정으로 엮이고 싶어요
아랫배의 온기만으로도 이 여자다 짚어내는
그런 남자가 돼주세요

집에 돌아와 신발끈을 푸는 순간
업혔던 누군가가 내린 것처럼
전신이 나른해지는 것이다
배낭에서 단풍잎 하나가 떨어진다


 

 

# 전영관 시인은 충남 청양 출생으로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람의 전입신고>,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슬픔도 태도가 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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