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접속사 - 정진혁

마루안 2020. 10. 27. 19:30

 

 

접속사 - 정진혁


그리고를 손에 들고 조금 울었다
눈 코 입을 기억하는 일은 슬펐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보다 더 질긴 접속사를 남기고 갔다
도처에 상처는 늘어나고 그 흉터마다 접속사 하나씩 자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가난은 적절한 접속이었고
그러므로 가난은 간절한 접속이었다

왜냐하면 덮고 잠을 청했다 어떤 밤도 오지 않았다
상처는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 늘 우리 곁에서 영역을 넓혔다
미루나무 끝까지 접속을 밀어 올리기도 하고
고양이의 눈 속에서 그런데를 찾아내기도 하고
빨랫줄에 더구나를 말리며 변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언저리만 흔들릴 뿐
물려주고 간 것이 접속사인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접속이 안 되는 생 속에서 나는
그러나 추잡한 속셈의 기다림일 뿐이고
그래서 알아야 할 것보다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 접속의 숲에서
우리는 우리를 거부했다
대학을 포기하고
사루비아는 빨강을 버렸다
불타는 칸나처럼 누나는 집을 나갔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접속
그래서
아버지의 전생이 우리에게 왔다

예컨대 접속은 자꾸 끊어지기만 했다
내게 남은 접속은 상처가 다음 상처를 부르는 데 사용될 뿐이었다

접속을 껴안으면 피가 났다
접속은 표정을 짓지 않았고
우리는 자꾸 혼자가 되어 갔다

접속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버지는 갔다
접속으로 불러들일 사람 하나 없이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떠돌기만 했다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판

 

 

 

 

 

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 정진혁


나는 어느 생의 방파제에서 떨어졌다
실업이 자꾸 나를 밀었다
어깨를 가만히 세우면 어긋난 각들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떨어진 어깨에 모난 말들이 터를 잡았다

깨진 것들은 왜 타인의 얼굴을 하는가

수박은 박살이 나고 병은 깨지고 그해 여름도 산산이 부서졌다
어깨는 어느 생의 모퉁이였다가 나였다가 떨어진 각을 아는 척 했다

팔을 들었다 내릴 때마다 각들이 서로 찌르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너무 오래 서성거렸다

걸음걸이가 세모다 표정이 세모다
가슴 언저리에도 세모가 자라기 시작했다
세모를 걸으며 나는 충분히 무모했다

실업은 질기고 캄캄했다
밤마다 도처에 머물던 각들이
일제히 어깨로 달려와 수런거렸다

나는 말수가 적어졌고 대신 각들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떨어진 각도를 지우기 위해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나를 놓친 시간은 까맸다
죽은 숫자들이 우글거리는 달력을 떼어 부채질을 했다
그해 여름의 날짜들이 떨어지며 각이 되었다



 

# 정진혁 시인은 1960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으로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로 올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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