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별의 서 - 허연

마루안 2020. 10. 22. 21:48

 

 

이별의 서 - 허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지
사실 이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

한 시절 자주 웃었고
가끔 강변에 앉아 있었다는 것뿐

그사이 파산과 횡재와
저주와 찬사 같은 게 왔다 갔고

만국기처럼 별의별 일들이 펄럭였지만
우리는 그저 자주 웃었고
아주 가끔 절규했지

철로가 있었고
노란 루드베키아가 있었고
발가락이 뭉개진 비둘기들이 있었고
가끔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많았지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단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 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우리는 할 일을 다한 거 같았고
강변에서 일어나기로 했지

기뻐서 했던 말들이
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기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지옥에 관하여 - 허연


때로는 사람이 지옥을 찾지 않고 지옥이 사람들을 찾기도 한다.

두려움일 수도 가엾음일 수도 있고, 두통이거나 복통일 수도 있고, 이렇게 지옥의 목소리가 사람들을 찾아오기도 한다.

나는 불타고 싶구나. 
모르는 언어로 말하고 싶구나.
미리 지옥을 보지 않겠니. 

고통에는 크기가 없듯이. 이곳에서는 신을 보기 위해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부른다.

그래도 그들을 견디게 하는 건
몇 장의 고증된 그림들과 진중한 건반들이다.

지옥이 두려운 사람들

누군가는 오른손에서 빛이 흘러나왔다고 하고, 누군가는 물 위를 걸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갈라진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착각이 시작됐다.
지옥은 오는데
아직 그는 오지 않았다.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대학원 석사, 추계예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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