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낡은 신발 - 심종록

마루안 2020. 10. 22. 22:17

 

 

낡은 신발 - 심종록


신발을 잃어버렸다
백감독도 만나고 인디안 수니도 만나고
반가운 사람 손도 잡아 흔들고
초면인 사람과 통성명도 하고
삶과 죽음이 뒤섞인 자리
밤늦은 시간이지만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잔 마다하며
입술이나 축이다가 자정 근처에서 일어섰는데 신발이 없다

다리 아래 좁은 구멍에서 빠져나와
첫 발 떼기 시작할 때부터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지금은 몇 번째인지 톺아볼 순 없지만
여기까지 나와 동행한 신발이여 나의 분신이여
사제를 함께 하자던 도반이여
때로 똥 밟은 자존심의 더러운 위안이여 네가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어느 쓸쓸한 날 세상과 하직하기 위해 백척간두에 올라서는 사람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후 한쪽 발부터 내민다는데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열에 아홉은 그런다는데
호탕하게 웃고 있는 저이도 제 신발 가지런히 벗어놓고 영정 안에 들었을 것인데
미처 못 끝낸 이 세상 일 하나가 갑자기 발목을 잡아
헐레벌떡 남의 신발 꿰어 차고 나간 것일까
사라진 신발 앞에서 전전긍긍하다 깨어나니 꿈이다

꿈속에서도 집착하는 우바새여
입으로만 주절거리는 악다구니여


*시집/ 신몽유도원도/ 도서출판 한결

 

 

 

 

 

 

카타콤 - 심종록


마지막 연기 흩어졌다
이제 너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낮술 환영 간판이 걸린 카타콤
이별도 익숙해지면 마냥 쓸쓸한 건 아니다
지나쳐왔던 생을 잠시 돌아본다
치정의 노른자위가 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황사가 스산하게 오후를 가린다

한 때 규사를 향해 전력 질주하여
점화되는 성냥불 같았던 섹스
새벽 한 시를 흔들고 지나가던 격정
휘몰아치던 울음 그리고
관자놀이에 박힌 금속파편 같았던 석양
그 모든 선율의 근원인 너를 지우고
카타콤으로 들어선다

담장 너머로 느리게 목련꽃 피는



 

# 심종록 시인은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는개 내리는 이른 새벽>, <쾌락의 분신자살자들>, <신몽유도원도>가 있다. 천상병 귀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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