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몽골에서 쓰는 편지 - 안상학

마루안 2020. 10. 23. 21:37

 

 

몽골에서 쓰는 편지 - 안상학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만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고비의 시간 - 안상학


지나온 날들을 모두 어제라 부르는 곳이 있다
염소처럼 족보도 지금 눈에 있는 어미나 새끼가 전부
지나간 시간들이 모두 무로 돌아간 공간을 보며 살아가는
황막한 고비에서는
그 이상의 말을 생각할 그 무엇도 까닭도 없으므로

남은 날들을 모두 내일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펌프가 있는 어느 작은 마을 
사람이라곤 물을 길어 가는 만삭의 아낙과
뒤따라가며 가끔 돌아보는 소녀뿐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황황막막한 고비에서는
굳이 그 이상의 말을 만들 어떤 필요도 없으므로

시간과 거리를 물으면 금방이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운전기사와 길을 잃어도 쥬게르 쥬게르(괜찮아 괜찮아)만 연발하는 가이드를 보면서 나는 모든 지나간 날들을 아래라 부르던 내 할머니의 시간에도 새겨진 게 분명한 몽고반점과, 싸울 때면 쥐게라 쥐게라(죽여라 죽여라) 악다구니를 쓰던 할머니의 지워지고 없는 몽고반점을 떠올리며, 고비에다 주막을 차리겠다는 사내와 쏘다닌 열흘 동안을 나는 모든 지나간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나날들을 어제와 내일로 셈하며 동업할 생각을 해 보았다


 


# 안상학 시인은 1962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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