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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이 - 김유미

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이 - 김유미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낯선 이름 하나가 귓가를 스쳐 간다 이름은 한 사람으로 다가와서 다중으로 사라졌다 이름을 벗기면 돌아가는 어지럼증이 되었다 혼자서 가다가 뜨거워져서 우는 낯섦 같았다 헛바퀴가 되어 주저앉는 이름 부르는 이름이 내 이름인지도 모르고 불쑥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싶었다 이럴 때 이름이 내 말을 잘 들어 먹는 명사 같구나 생각한다면 어딘가에 세워 둔 우산의 기다림에 어딘가에 새겨 놓은 마음의 이면에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두 귀만 남아 몸만 일어서면 이름은 비척비척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집/ 창문을 닦으면 다시 생겨나는 구름처럼/ 파란출판 술래 - 김유미 빛들이 눈을 쪼아 빠져나가는 증세 의사는 빛의 부리를 뽑는다는 약들을 처방해 ..

한줄 詩 2021.03.16

악의 평범성 - 이산하 시집

이산하 시인이 드디어 시집을 냈다.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예전에 어쩌다 보니 그의 시집 를 읽었다. 인상 깊은 시집을 읽으면 시인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 따라온다. 이후 라는 그의 산문집을 읽고 이 시인을 온전히 마음에 담았다. 시대와의 불화 때문인가. 너무 긴 시간 시집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영영 시 쓰기를 단념한 것인가 했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하면서 기다렸던 시인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아주 묵직한 시집이다. 시인도 내용도 출판사 창비하고 딱 어울린다. 빌려온 것이지만 이라는 제목이 그의 시와 잘 맞는다. 문학계에도 권력이 있어 가끔 들리는 메이저 출판사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창비에서 나오는 시집은 빼놓지 않고 들춰본다. 창비 시집이라고 다 좋기만 할까. 나는 메이저보다 2등..

네줄 冊 2021.03.15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에서 만난 시

난데없는 코로나 때문에 봄을 잃어버린 작년에 이어 2021년에도 제대로 된 봄을 맞긴 힘들 듯하다. 어쨌거나 징글징글한 코로나 시국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온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작년까지만 해도 이리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백신이 나오더라도 당분간 마스크에서 완전 해방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여행지로 떠날 버스나 비행기를 기다리며 붐비는 대합실에 앉아 있던 시절이 그립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공연장에서 연극을 봤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어쩌다가 최대한 얼굴을 가리는 것, 가능한 사람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뀐 일상에서도 세월은 흘렀다. 다른 해보다 다소 일찍 온 봄소식과 함..

여덟 通 2021.03.15

봄이 올 무렵 - 허림

봄이 올 무렵 - 허림 겨울에는 일이 없다고 대처로 막일 하러 간 사람들이 돌아올 때가 되면 강은 근육질의 얼음을 푼다 그 무렵이면 동네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고로쇠수액을 받거나 둠벙에 얼음 깨고 얼음사리 하는데 족대에 걸려든 고기의 눈빛 보고 올 농사 점을 치기도 한다 점이란 어쩌다 맞거나 틀릴 수 있는 일이건만 고기의 눈빛에 어린 점괘를 뽑아 어탕을 끓여 시린 속을 푼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간 궁금해지는 나이가 되면 점괘가 보고 싶은 것 산그늘에 쌓인 눈이 녹아 덧물 져 밀려가고 삼월 하순 폭설이 하루쯤 발목을 잡는다 해도 봄이 오는 길목 창촌 별다방 정 마담은 노란 치마를 입고 아지랑이 커피를 내릴 것이다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신발 - 허림 사랑방 문턱은 내 이마에 난 혹을 기억하겠지 바람..

한줄 詩 2021.03.15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 심명수 시집

사춘기인 10대 중후반 시절을 온전히 인천에서 보냈다. 6년 정도의 기간이지만 한창 호기심 많던 시절이어선지 고향처럼 느낀다. 그때 살았던 인천의 달동네 골목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살았던 동네 뒤편 야트막한 산에 장애인 학교가 있었다. 아마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였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 불량기 있는 동네 아이들조차도 웬만해선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어른들만 급한 일이 있을 때 지름길 용으로 다녔을 뿐이다. 내게도 장애인 형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유산인 빚더미와 줄줄이 남은 자식들을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했다. 설상가상 갑자기 초등학교 다니던 형이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하게 다리를 절게 된 형은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형은 서로..

네줄 冊 2021.03.12

은하의 집, 불시착한 별들의 보호소 - 심명수

은하의 집, 불시착한 별들의 보호소 - 심명수 공명처럼 미확인물체가 감지되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나 어린 날 어떤 의도와는 무관하게 지구로 불시착했다는 생각, 생각이 떠돌던 그때는 상상의 비행을 하다 가벼운 농담처럼 지구로 떨어졌다고 생각했지 물론, 은하의 집은 지구의 크레바스 밤하늘은 자책과 원망의 무덤이었어 간혹, 천공은 무료한 자아의 탈출구이기도 했지 은하의 세계는 생각보다 생각이 미치질 못해서 화가 났지만 일생을 걸지 않으면 일생이란 없다는 걸 그땐 몰랐어 반짝이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 화려한 우울증을 앓다가 목을 맨 인형이 떠올랐고 우울은 베갯잇처럼 실밥 터진 곳이라곤 없었어 죽은 인형은 보라 틀의 별자리가 되었다지 별자리를 잇다 보면 큰부리새, 황새치, 여우, 땅꾼, 돌고래라는 이름을 가진 이..

한줄 詩 2021.03.12

외로운 식사 - 김점용

외로운 식사 - 김점용 혼자서 주로 밥을 먹는 그는 외로움을 떠벌리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두고두고 먹는 일용할 양식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절규하던 밥솥도 그의 집에선 입을 꾹 다문다 입을 다문 채 벽 속으로 들어가 다정한 벽이 된다 김치냉장고도 말을 극도로 아낄 줄 안다 오래된 수박 속에서 그는 웅크린 채 잠을 잔다 다음날 검은 수박씨 같은 말들이 싱크대 위에 흩어진다 외로움의 둘레가 넓어질수록 별은 차갑게 뜬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놓인 수저 태양의 누생이 다녀간 흔적들 역력해도 그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연이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연이 아니고는 벗어날 수 없는 갑옷 같은 사방의 벽들이 혓바닥을 내밀어 감옥을 핥는다 그가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시집/ 나 혼..

한줄 詩 2021.03.12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 허태준

제목부터 울림을 주는 책이다. 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병무청이 지정한 산업체에서 일하며 군복무을 해결한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다. 저자의 글솜씨 덕분에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힘이 있다. 한국에서 고졸은 다소 애매하다. 열에 일곱 여덟은 대학을 가는 판국에 고졸을 바라보는 시선도 애매하다. 사고 치고 짤린 불량 학생으로 치부한다. 공부는 더럽게 못하면서 으슥한 골목에서 담배 꼬나 물고 힘 없는 애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기도 한다. 대부분 이런 시선을 보낸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못 갔든, 불량 학생으로 놀다 공부를 포기했든 간에 고졸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까마득한데 고졸은 더하다. 일할 수 있는 직종도 한정적이다. 모든 기업은 사원을 뽑을 때 4년제 정규대학 졸..

네줄 冊 2021.03.11

고로쇠나무가 인간에게 - 정기복

고로쇠나무가 인간에게 - 정기복 인간의 위장은 온갖 욕망들로 다양하나 나는 방어기제를 갖지 못했다 봄이면 득달같이 달려와 한 해 온전히 농축한 수액을 수령해 간다 나의 안녕이나 숲과의 조우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내 줄기에 흐르는 푸른 피가 그들 몸 어떤 처방에 도움이 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구멍 뚫고 호수 박아 얻고자 하는 육체의 환희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내게 하는 가학은 온당치 못하다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숲의 정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만물과 매한가지로 한 생명일 따름이며 우리네 날숨이 그네의 들숨이며 그네의 날숨이 우리네 들숨이다 멈추지 않는 호흡과 호흡이 숲을 이루고 숲이 없다면 그대들도 없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김광석 - 정기복 젖은 듯 보송..

한줄 詩 2021.03.11

울음이 길고 붉다 - 김유석

울음이 길고 붉다 - 김유석 는개는 적시는 몸이 붉다. 는개는 내려온 허공을 바닥으로 바꾸어 몸에 두르는 울음이 붉다. 밟히면 꿈틀하는 것은 몸이 아닌 울음. 늘였다 줄였다, 주름으로 이룬 것들의 몸은 길다. 제 살보다 무른 데만 뒷걸음질 치듯 짚어가는 그것의 울음도 가지런하게 길다. 일획의 생, 머리에서 꼬리까지 땋는 길이 허공보다 아득하여 는개는 오는 날은 길고 붉은 것들이 공중에서 기어 나와 운다. 지르렁 무지르렁, 묽은 초저녁 뒤안을 자기공명하며 저렇게.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상상인 울음주머니 - 김유석 애비도 모를 씨 사람 손에 받아와서 사산한 새끼 눈 뒤집고 핥아대는 어미 소. 몸에서 함석 두레박 내리는 소리 같은 게 샌다. 이미 죽은 줄 뱃속에서부터 알았지만 그런 짓밖에는 도무지 ..

한줄 詩 202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