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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매 - 이승원

콩가루 집안의 가족 이야기이자 너무나 성격이 다른 세 자매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바보처럼 너무 착하고, 한 사람은 영특하고 이재에 밝으나 지나치게 가식적이고, 한 사람은 내키는 대로 사는 자유주의자이면서 자기 주장이 뚜렷하다. 어느 가정이나 숨기고 싶은 사연 몇 가지는 갖고 있다. 이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딱 우리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명절이든 제사 때든 만났다 하면 마지막엔 싸움으로 끝난다. 그 갈등의 중심은 늘 나였지만 풀리기보다 꼬이는 일이 더 많았다. 정상적인 가족이 없다. 한 사람은 너무 소심해 바보 같고, 한 사람은 너무 가식적이어서 여우 같고, 한 사람은 너무 철이 없어 백치 같다. 막판에 밝혀지지만 이 세 자매의 원천적 꼬임은 아버지에게서 출발했다. 하나 있는 남동생까지 찌질함이..

세줄 映 2021.02.27

이젠 잊기로 해요 - 백인덕

이젠 잊기로 해요 - 백인덕 종이창 불빛 새는 어둑한 골목길을 내려와 늘 우리가 멈추고 떠나야 했던 우체국 앞 버스 종점 그대는 말아 쥔 신문을 흔들며 웃었지만 턱 낮은 언덕 하나 넘어가기도 전 나는 알았지. 가을 저녁 쓸쓸한 바람보다 먼저 비탈길을 올라 나중에 도착하는 종소리 나는 그대의 공명(共鳴)같은 사람이었음을. 성당으로 향한 나무 등걸에 기대어 그대를 쫓아 썰물로 밀려간 세상을 위해 축복하리. 성호를 긋고 돌아서면 나는 이내 물빛 고운 섬, 푸른 방 안에 갇히네. 갇혀 깃 작은 새가 되고 단 한 번 그대의 사람이 되어보지만 어느 날 더 높이 자랄 생을 위해 밤마다 제 잎을 버리는 검은 나무처럼 그대는 그대의 고단한 추억을 떨구리라. 나 영영 잊혀도 순간, 순간 잊힌대도 돌을 새기는 어리석음에 망..

한줄 詩 2021.02.27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 황동규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 황동규 '우리의 백 년 한 세기가 다 지나가고 있네. 이제 엉덩이와 뒷다리만 남았어.' 낙상으로 누워 네가 말했지. 그런가? 하긴 우리 백 년의 엉덩이가 가파르긴 한 것 같아. 산책길을 반으로 줄였어도 몇 번인가 걸음 멈추고 숨 고르게 하거든. 내 전화 받아라. 산책 중이다. 내일부터 산책 다시 시작한다고? 아직 진달래 산수유 꾀꼬리는 없지만 네가 한때 입에 달고 산 노루귀는 소식도 없지만 흔친 않으나 노란 복수초들 얼굴 내밀고 공기의 맛이 전과 확연히 다르다. 네가 내일 너네 뒷동산에 오르면 너도 모르게 전과 다른 숨을 쉬고 있을 거다. 갈림길 만날 때마다 생각이 간질간질해지는 길을 걷다 보면 지난 한 세기의 엉덩이쯤 한번 걷어차보고 싶겠지. 뭐, 내 엉덩이라 생각하고 차겠..

한줄 詩 2021.02.27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 정선희 시집

생각 같아서는 이 땅의 시집을 모두 읽고 싶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꿈은 여전하다. 어쩌다 걸려든 시집에서 가슴에 쏙 들어오는 시를 발견할 때 기쁨이란 겪어보지 않으면 그 묘한 희열을 모른다. 섹스할 때의 오르가슴은 그때뿐 곧 허무함이 밀려오지만 시집은 여운이 길다. 내가 이 맛에 시를 읽지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시집을 읽었다. 는 정선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다소 밋밋했던 첫 시집과 달리 이번 시집은 맛이 확실히 느껴진다. 한 사람의 시집인데도 읽는 맛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문학적인 비평이야 평론가들에게 맡기고 순전히 아마추어 생각이다. 첫 시집에 비해 쌉싸름한 맛을 느낀다. 요즘 출판사 상상인에서 몇 권의 좋은 시집을 발견한다. 내가 읽어 본 적이 없는 문예지도 발행하는 무명의 출판사지만 시..

네줄 冊 2021.02.26

간헐한 사랑 - 안상학

간헐한 사랑 - 안상학 ​ 심장이 그러하듯이 일정한 시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퐁,퐁 솟는 샘이 그러하듯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간헐한 법이지요 꽃이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듯이 좀 길기는 하지만 우리 사랑도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전생과 이생과 내생... 한 번씩 말이지요 해가 간헐적으로 뜨고 지듯이 달이 간헐적으로 차고 이우듯이 사랑도 간헐적으로 틈틈이 사이사이 쉬었다 이었다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영원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간헐한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요즘 언제 있었나 싶은 내 사랑이 간헐하게 이우는 소리는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

한줄 詩 2021.02.26

사라지는 모든 것은 가장자리로부터 - 최세라

사라지는 모든 것은 가장자리로부터 - 최세라 나의 뒤에서 내리는 눈은 부작용 같은 하루를 떠메고 날아가는 긴 긴 어지러움​ 혀 밑에서 마이신 껍데기가 녹는다 잊은 꽃이 나타나기로 한 봄의 어귀까지 왔는데​ 하루만 살고 말 것처럼​ 사랑은 늘 어디까지 벗어 던질 수 있는가 묻기만 한다 부레를 삼키는 날들이다 물의 표면 어딘가 아슴푸레 불확실한 날들이다 물을 놓아주는 우수에 녹았던 것을 다시 얼리지 않아도 되는 우수에 홀씨를 가득 품은 흙들이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린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가장자리로부터 어깨를 움츠리고 보고만 있다​ 처음의 끝과 마지막의 시작들 차가운 얼음장 아래 살점이 허는 맥없는 물고기처럼 혀 밑에서 녹아 가는 온갖 약의 껍질들​ 언제쯤 뱉을 수 있을까요 곧 나에게 처방되지 않은 싸락눈이..

한줄 詩 2021.02.26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 호프 자런

좋은 책을 읽었다. 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이 제목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겼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후 사냥을 하며 살다가 문명을 이루고 이제는 지구를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풍족함과 편리함을 누리고 있지만 지구는 그만큼 힘들어 하고 있다. 우선 빼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언제까지 화석 연료를 뽑아 쓸 것인가. 화석 연료는 40억 년이 넘는 지구 나이 동안 갖은 변화를 겪으며 조금씩 축적된 물질이다. 그것을 인간이 나타나 근 100년 만에 완전 뽕을 뽑듯이 흥청망청 쓰고 있다. 무한정으로 나오는 석유와 석탄이 아니다. 저자는 조목조목 인간이 누리는 편리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변해버린 대기, 따뜻해진 날씨, 녹아내리는 빙하, 높아지는 수위, 가혹한 작별 인사로 이어지..

네줄 冊 2021.02.23

울음의 안감 - 정선희

울음의 안감 - 정선희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설익어 목소리가 갈라지는 울음이 있고, 색을 덧발라 속이 안 보이는 울음이 있고, 물기가 가득해서 수채화처럼 번지는 울음이 있다는 것을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아이는 속으로 자란다 그날 호주머니의 구멍 난 안감처럼 울음은 움켜쥔 손아귀에서 허무하다는 걸 알아버린다 그 후 내가 만난 모든 울음은 그날 밤에 바느질된 듯 흐느끼며 이어져 있다 실밥을 당기면 주르륵 쏟아질 그날의 목록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다섯 여자가 모여 앉아 울음 같은 모닥불에 사연 하나씩 쬐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다른 사람, 몰랐던 사람이었다 관계란 아름답지 않은 한 줄 문장 같은 것을 붙잡고 있는 것 울음은 죽은 이에게 가지 않고 자신을 적시다 얼룩질 텐데 죽음을 당겨 울음의 안감..

한줄 詩 2021.02.23

아름다움에 대한 일고(一考) - 조성순

아름다움에 대한 일고(一考) - 조성순 히말라야 고산지대 산양 떼는 소금기를 찾아 벼랑을 헤맨다고 한다. 창공에 걸린 낮달을 배경으로 낭 끝에 우뚝 선 너를 보고 고독을 사랑하는 검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날 선 작두 위 무격이고 몸이 갈망하는 생존을 위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산길을 가다 웃고 있는 바람꽃이 곱다고만 하지 말아야겠다. 나날이 절박하고 하루하루 시시때때 존재의 창끝으로 격전을 치르고 있다. 뿌리에서 대궁까지 필생을 걸고 하늘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집/ 왼손을 위하여/ 천년의시작 화두(話頭) 만경대(萬景臺) - 조성순 하는 일마다 막히고 신세는 독 안에 갇힌 쥐 모양 진퇴유곡 비상구로 찾은 만경대 암릉 용암문에서 위문까지 하얗게 날선 바위들 피아노바위에선 머리를 조심하고 사랑바위에선 ..

한줄 詩 2021.02.23

인간 없는 세상 - 앨런 와이즈먼

오래 전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다. 미뤘다가 놓쳐버린 책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제야 읽었다. 코로나 때문에 일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고 가능한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부터 책 읽는 시간이 늘었다.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면서 무기력해질 때가 있지만 그나마 책이 있어서 다행이다. 툭 하면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배낭을 챙겼던 날들이 까마득하다. 죽자사자 간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서도 방역수칙이 먼저다. 처음엔 힘들었으나 차차 이런 일상에 적응이 된다. 술집 안 가고 여행 안 가는 일상이지만 심심할 틈은 없다. 철저하게 TV와 주전부리를 멀리 해야 책 읽기도 지속할 수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운동 습관 무뎌지는 것처럼 게으름이 잽싸게 자릴 잡기 때문이다. 개정판으로 나온 은 책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빌딩이 빽..

네줄 冊 2021.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