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나무가 인간에게 - 정기복
인간의 위장은 온갖 욕망들로 다양하나
나는 방어기제를 갖지 못했다
봄이면 득달같이 달려와
한 해 온전히 농축한 수액을 수령해 간다
나의 안녕이나 숲과의 조우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다
내 줄기에 흐르는 푸른 피가
그들 몸 어떤 처방에 도움이 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구멍 뚫고 호수 박아
얻고자 하는 육체의 환희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내게 하는 가학은 온당치 못하다
나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숲의 정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만물과 매한가지로 한 생명일 따름이며
우리네 날숨이 그네의 들숨이며
그네의 날숨이 우리네 들숨이다
멈추지 않는 호흡과 호흡이 숲을 이루고
숲이 없다면 그대들도 없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김광석 - 정기복
젖은 듯 보송보송하고,
서걱서걱한 듯 촉촉하고, 즐거움인 듯 아파하고
그 아픔 다독여 어루만지는
쓸쓸한 남자의 중얼거림인가
애달픈 가객의 한 소절 시름인가
세이렌처럼 파고드는 샤먼의 주술인가
뼈마디 꺾이는 무료,
충만 속의 무료가 짖어내는 음률이,
젊은 한 시절의 가락이 옛날인 듯 아닌 듯 들려와
지나는 거리에도,
거친 술잔 탁자에도,
홀로 앉은 방 안에도 그가 들려와
심장에 젖어 들어
심장에 젖어 든 박동은
부드럽게 목을 타고 흘러넘쳐
신파인 듯 아닌 듯,
꿈인 듯 생시인 듯,
거리에서, 술집에서, 방 안에서
가고
없는 오랫동안
없이 살아야 할 남은 날들도
있는 듯, 없는 듯
흐느끼는 듯, 속삭이는 듯
그렇게
짧은 생애
세상 노래하고 갔으니
이제 세상이 그대 노래해야 하리....
# 정기복 시인은 충북 단양 출생으로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떤 청혼>,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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