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에서 만난 시

마루안 2021. 3. 15. 19:49

 

 

 

난데없는 코로나 때문에 봄을 잃어버린 작년에 이어 2021년에도 제대로 된 봄을 맞긴 힘들 듯하다. 어쨌거나 징글징글한 코로나 시국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온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작년까지만 해도 이리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백신이 나오더라도 당분간 마스크에서 완전 해방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여행지로 떠날 버스나 비행기를 기다리며 붐비는 대합실에 앉아 있던 시절이 그립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공연장에서 연극을 봤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어쩌다가 최대한 얼굴을 가리는 것, 가능한 사람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뀐 일상에서도 세월은 흘렀다.

 

다른 해보다 다소 일찍 온 봄소식과 함께 새로 나온 창작과 비평에서 마음 가는 시가 눈에 띈다. 20년 후쯤 나는 2021년 봄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인명은 재천이기에 그때까지 살아 있기는 할까. 시가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는 요즘이다.

 

 

사는 힘 - 배창환

 

 

시멘트 금 간 마당 틈새

비치파라솔 그늘, 잠시 쉬는 내 허리까지

쑥, 올라온 씀바귀 꽃대

해를 따라왔는지 피해 왔는지

우주의 중심에서 폭발하는 별처럼

사방팔방 달아나는 꽃맹아리들

빠당빠당하고 깐깐하고 눈부시다

 

이렇게 쬐그만 꽃잎 언저리에도

아침 일벌들은 아이구 좋아라, 덤벼든다

 

사는 것이 다들 최선이다

 

햇살 달아오르는 마당 질러

나도 텃밭 가려고 벌떡 일어서는데

뒷집 아이 울어 짱짱하게 담장을 넘는다

저 아이도 고픈 것이 있나보다

눈 감고 숨 멈추고 귀를 세우니

아니다 길냥이 소리다

 

고픈 것이 힘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그 힘으로 울고

울지 못하는 것들은

더는 삶이 고프지 않은 것이다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

 

 

 

 

어느 오랜, 먼 날 - 배창환

 

 

살풋 든 꿈에 보았다

아홉살 무렵, 감나무 가지 새로 활짝 웃는 사진 속 네 모습

그리고 낯익은 시골 마을, 북적대는 상가였을 게다

문상객들 틈에서 마당 구석으로 내 소매 이끌어

나란히 쭈그려 앉았는데 네가 귓속말로

살짝, 말했다

 

-아빠, 돈 좀, 주까?

그러고는 누런 오천원짜리, 구겨진 지폐 한장

내 눈앞에 내밀었다

도랑을 건너오는 습한 빛살처럼

네 두 눈이, 쓸쓸히 웃고 있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뛰쳐나오니

뿌리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얼른 아버지가 가실 때처럼 금강경 틀어놓고

끊어진 필름을 애써 이어보았지만

 

누구였을까, 사람들이 흐느끼며 바라보고 있던

마루 끝 영정 속 그 얼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는데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배창환: 경북 성추 출생, 1981년 <세계의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잠든 그대>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백두산 놀러 가자>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겨울 가야산> <별들의 고향에 다녀오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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