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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죄 - 이산하

살아남은 죄 - 이산하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세상이 폭발 직전일 때 키 큰 한 젊은 노동자가 광화문 광장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DJ, YS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죽을 줄 알았던 노동자가 '기어이' 소생해버리자 그들은 더이상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박종철의 관에 또 하나의 관을 쌓아 연쇄폭발시킬 큰 호재가 사라져 내심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는 살아난 것이 죄여서 30년이 지난 아직도 우울증을 앓으며 자기 몸의 불을 꺼준 사람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운동화 한 짝 - 이산하 반쯤 창문이 열린 신촌 노고산 '이한열기념관' 유품 전시실 원래대로 복원된 바스러진 흰색 타이거 운동화 한 짝 여전히 맨 ..

한줄 詩 2021.03.26

버드나무로 올라가는 강물 - 박승민

버드나무로 올라가는 강물 - 박승민 등이 퍼렇게 얼어붙은 배(腹) 밑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랑은 또 물컹, 물컹 흘러간다. 같은 몸이지만 다른 표정으로 한때, 밭에서 막 뽑아낸 배추 포기처럼 푸른 시절이 우세한 적 있었지만 폐나 위장, 내 기억의 일부는 수장고 속에서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 아침마다 썩은 구취가 장롱 가득, 하품하는 입으로 아침 해가 들어온다. 몸이란, 죽은 시간과 살아 있는 시간이 겹치면서 서로 충돌하면서 그 무엇으로 살아가는 수로(水路). 어두워지는 한복판에서 빛을 오래 잡고 허물어져가는 물의 반짝이는 등을 본다. 죽은 몸이 푸른 봄을 허공에 걸어놓았다. 살아 있는 작은 잎이 관(棺)을 뚫고 시퍼런 꼭대기까지 삶을 끌고 간다. *시집/ 끝은 끝으로 이어진/ 창비 끝은 끝으로 이..

한줄 詩 2021.03.23

오늘의 작법 - 전형철

오늘의 작법 - 전형철 눈물짓되 눈물 흘리지 말 것 삶의 단어로 내 선 곳에서 가장 먼 데로 찌를 던질 것 열 번을 읽어도 모르는 것은 피돌기가 맞지 않음으로 과감히 폐기할 것 관념으로 휘젓고 감각으로 쓸 것 제목과 내용은 처가와 고부(姑婦)의 거리로 정위치시킬 것 미소와 울음을 양날의 검으로 삼을 것 신(神)보다 귀(鬼)나 마(魔)와 친분을 유지할 것 태양을 피하되 촉기를 잃지 말며 취하지 않음을 경계하고 만나는 것들의 이름으르 다시 지을 것 길은 돌아가되 마주할 작은 기적을 놓치지 말 것 세 단어로 말하고 한 줄을 소중히 할 것 기한을 지키지 말고 물고기를 잡지 말며 새의 길을 따르지 말고 바다와 허공을 문신으로 새길 것 채무와 추방을 지병 삼고 장수를 포기할 것 후손을 걱정하지 말고 이 별에 다시 ..

한줄 詩 2021.03.22

정 안 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 정선

정 안 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 정선 빌어먹을, 불안이 템버린을 흔들며 낙산 골목을 통과했다 단 한사람이면 족했다 제아무리 단단한 소금벽들도 혀로 허물어지고 두 손을 묶는다 해도 퇴색은 오는 것 이별은 단계학습이 필요치 않아 눈빛을 마주치고도 못 본 척 즐거이 웃는 잔인한 맥주잔 너머 그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던가 거품을 바탕그림 삼아 오 초의 눈빛을 견디니 결별은 더욱 견고해졌다 결별은 떫은 말, 어떻게든 살아내야겠다는 캄캄한 의지 애초에 누군가와 무엇을 도모한다는 건 내겐 슬갑도적 같은 일 금관을 쓰고 배꼽에 피어싱을 한 그는 이제 바람의 소유물이 되었다 나는 증오로 살아냈다 그러니까 증오는 숨탄것들의 부드러운 절규 증오가 민달팽이로 귓불을 핥았다 까똑, 스마트폰은 저 홀로 공중에 응답하고 덮어쓰시겠..

한줄 詩 2021.03.22

회진 - 전영관

회진 - 전영관 그가 오면 아침이 새뜻해진다 막연하게 자신감 생기는 것이다 능숙한 의사같이 쭈그러진 어깨를 펴주고 무릎을 칼날로 세워준다 굴종의 자세로 늘어지는 삼겹살 환멸의 증거로 널브러진 토사물 타협의 지분으로 뒤섞인 찌개 냄새들을 벤젠이라는 항생제로 치료한다 새물내 나는 옷을 곧바로 입는 것보다 어제 입었던 셔츠가 편한 까닭은 나만 편들어주는 체온이 남아서겠지 눈치가 태도로 남아서겠지 환절기에는 병원마다 감기 환자로 줄을 선다 세탁소가 벗어놓은 옷으로 그득한 것은 삶의 자세를 바꾸면 아프다는 뜻이다 품은 맞는데 기장이 짧은 미흡처럼 일상은 무언가의 트집을 무릅쓰는 일이다 물러서는 파도를 따라 잔걸음질치다가 되돌아서는 일이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보낼 때 확인했는데 배달되면 주머니마다 손 넣어본다 누..

한줄 詩 2021.03.22

대한민국 인구, 소비의 미래 - 전영수

불과 30년 전까지 아이를 낳지 말자는 표어가 있었다. 가족계획이라는 선진적(?)인 삶을 표방하던 시절이었다. 라는 표어에서 으로 바꼈다. 그랬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때문에 비상이다. 아직까지는 인구 감소에 대한 부작용이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먼 훗날 한국이 소멸 국가 맨 앞자리에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 많은 가정에 각종 불이익을 줬음에도 자식을 줄줄이 낳던 시절이 그립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세상은 변했다. 10년 전까지도 한국이 출산율 낮은 것으로 세계 1등을 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책은 인구 감소에 따른 한국 사회 현상과 소비 변화를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미 난데없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소비 패턴이 많이 변하기는 했다..

네줄 冊 2021.03.21

잃어버린 끈 - 김태형

잃어버린 끈 - 김태형 말 대신 가만히 손을 내밀던 할머니에게서 끈을 받아왔다 여러 개 가져와서 다 나눠 주고 하나만 남았다 어느 새 그것마저 어느 손목을 따라갔다 거듭 연결되어 그 끝이 없으니 매듭이란 성스러운 것이다 내가 나눠 준 끈은 지금쯤 남아 있을까 그게 영원이라고는 누구도 헤아리지 못해도 내 손목에서 풀려진 끈 하나 무엇엔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허공일지 모른다 저 어느 보이지 않는 암흑대 속의 별일지도 지구가 자전하는 동안 하나뿐인 심장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기운다 내 손목에서나 회오리치다가 또 다른 손목으로 건너간 마지막 끈 이전도 이후도 그 사이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으니 끊어져 잃어버린 끈이 되어서야 허공이 된다 그렇게 또 매듭이 이어지는 것일까 무수한 별들을 하나하나 지워 가던 눈길로 ..

한줄 詩 2021.03.17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목화가 피어 살고 싶다고 - 정현우 시든 억새를 쥐고 당신에게 가는 길 눈구름에 입술을 그리면 어떤 슬픔이 내려앉을까 눈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눈빛이 무슨 색으로 변할까 은색의 숲이 심장이 뛰기 시작해 몸속에 목화들이 우거져 당신에게 가는 문병은 어디로 휘어질까 마른 목화솜을 쓸어 모으면 마음엔 서리지 않는 유리 입김, 단 한번 몸과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살려주세요 빌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몸과 캐럴의 종이 울던 밤 솜 같은 당신을 안아보았지 한 사람을 지우기 전에 이 슬픔이 끝나기 전에 한 문장만 읽히고 있었어 사는 거 별거 있었냐 그냥, 목화가 피어 울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래, 엄마, 잘 자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용서 - 정현우 믿지도 않은 신에게 기도했다. 텅 빈 고해소에..

한줄 詩 2021.03.17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사내와 시계탑 - 전인식 저물 무렵 역 광장 한 사내가 시계탑을 등에 메고 앉아 있다 어디에서나 삶은 고행이란 걸 미리 알아버린 듯 턱 괴고 앉은 등 뒤로 노을이 후광(後光)으로 퍼져 흐르고 있다 몇 개의 사막을 건너온 다 닳아빠진 운동화 바람이 기거하기 좋은 낡은 작업복 북서쪽에서 온 바람이 그를 알아보고 일으켜 세운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흔들리는 덤불숲 조금도 꼼짝 않는 몸 쓰러질 것 같은 가벼움이 세상 위에 떠 있다 말라빠진 몸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올 한 올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한 눈금씩 돌아가는 시곗바늘 시계탑을 등에 멘 한 사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갈 길 바쁜 사람들 대신 역 광장 비둘기들만 우르르 모여들어 법문 듣듯 보리수나무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 ..

한줄 詩 2021.03.16

고구마 호수 - 이강산

고구마 호수 - 이강산 호숫가 늙은 여인이 고구마를 캔다 육지의 섬 같은 호수, 꽃을 든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가 닻을 내린 그 언덕배기 한사코 호수 쪽으로만 핏줄을 대던 고구마의 태를 끊고 있다 밭은 어느덧 붉은 호수다 봄마다 피어나는 청년의 붉은 꽃 같은 호수에 발목이 잠기는 줄도 모른 채 여인은 한 뿌리, 한 뿌리 호수를 캔다 짐작건대 호수의 뿌리를 어루만지는 저 여인도 한때는 꽃을 품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붉어지고 싶어서, 멋모르고 내 몸의 뿌리를 캐던 시절 그러나 지금은 고구마만 보아도 저절로 불어지는 때, 꽃을 깜박 잊고 왔는지 고추잠자리 청년 하나가 호수에 발을 담그다 떠난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이것저것 - 이강산 새벽차를 타려고 귀를 닦는데 귀에서 이..

한줄 詩 2021.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