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이 올 무렵 - 허림

마루안 2021. 3. 15. 19:37

 

 

봄이 올 무렵 - 허림


겨울에는 일이 없다고
대처로 막일 하러 간 사람들이 돌아올 때가 되면
강은 근육질의 얼음을 푼다
그 무렵이면 동네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고로쇠수액을 받거나
둠벙에 얼음 깨고 얼음사리 하는데
족대에 걸려든 고기의 눈빛 보고
올 농사 점을 치기도 한다
점이란 어쩌다 맞거나 틀릴 수 있는 일이건만
고기의 눈빛에 어린 점괘를 뽑아
어탕을 끓여 시린 속을 푼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간 궁금해지는 나이가 되면
점괘가 보고 싶은 것
산그늘에 쌓인 눈이 녹아 덧물 져 밀려가고
삼월 하순 폭설이 하루쯤 발목을 잡는다 해도
봄이 오는 길목
창촌 별다방 정 마담은 노란 치마를 입고
아지랑이 커피를 내릴 것이다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신발 - 허림


사랑방 문턱은 내 이마에 난 혹을 기억하겠지
바람벽 묵 낫은 내 왼손 검지가락 상처를 물고 있겠지
외양간 뒤 작두는 여물 썰다 싹둑 밴 오른손 검지 손톱을 먹었지
찬장 안쪽 뭉특한 숟가락은 여름날 감자를 까먹었고
바깥 잿간 세발자전거는 내 걸음을 싣고 주논고개를 달렸는데
그 길은 어디로 이어졌는지
녹슬고 이빨 빠져 문드러진 날들이 매달렸다
엿장수 가위 소리에 찾던 헛간이나 광속의 고물처럼
서로 닮은 얼굴들이 정겹고 징글징글한데
거미줄 깊은 상처를 감싸고
쥐들이 이빨을 다듬던 어둡고 익숙한 적막뿐
마냥 눈을 감고 또 나는 무슨 일로 그리할까
한 번 지나가 돌아오지 않는 바람이
그 신발에 발을 넣는다

 

 

 

 

# 허림 시인은 1960년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92년 <심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말 주머니>, <거기, 내면>, <엄마 냄새>, <누구도 모르는 저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