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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 심너울

심너울의 소설은 늘 먼 미래를 이야기한다. 아니 먼 미래라 할 것도 없겠다. 서울 올림픽이 33년 전에 열렸듯이 지금부터 33년 후 정도의 미래다. 예전의 10년과 지금의 10년은 변화 속도가 다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긴 해도 50년 전만 해도 10년 세월에 지금처럼 변화가 빠르지는 않았다. 예전에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세상이 올 줄 알았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그러나 근 미래에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고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접수할 거라는 것쯤은 예상을 한다. 심너울 소설에서도 여러 곳에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나온다. 인구가 줄어 들어 딱 한 명의 학생이 있는 초등학교가 있다. 한 명의 학생을 위해 교사 두 명, 조리사 한 명, 학교 관리인까지 4명이 근무한다. 4학년인 이 학생..

네줄 冊 2021.03.29

발라드의 끝 - 황동규

발라드의 끝 - 황동규 개나리 필 무렵 성했던 눈마저 황반변성 안구주사 맞기 시작했다. 앞으론 확대경 없이 신문 읽을 생각 말게! 안됐다는 듯 서달산이 아지랑이 피워 올리고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들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아지랑이 자욱이 오르는 오솔길이 한때 마음 되게 빼앗겼던 발라드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반절은 괜히 바쁘게 살았다. 우연히 들어보니 가뿐한 호박. 나머지 반도 볼 것 못 볼 것 미리 가리지 않고 제대로 살았던가? 봄이 몸살 톡톡히 앓고 있는 곳, 오솔길 구비를 돌자 눈이 밝아진다. 아지랑이 속에서 하양 노랑 나비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세필(細筆) 춤사위들이 시각(視覺)을 춤추게 한다. 눈높이가 여직 이토록 눈부실 줄이야! 발라드는 끝머리에서 삶을 가볍게 ..

한줄 詩 2021.03.29

슬프게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 신표균

슬프게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 신표균 사춘기를 앓기에는 봄날의 보폭이 너무 짧아 삼월이 종종걸음 친 다음에야 깨우쳤습니다 자목련 큰언니 부풀어 오른 암꽃이삭 버들강아지 칭얼대는 옹알이 듣고서야 브래지어 뽕 터진다는 것 삼월이 꼬리 감추려 할 즈음에야 눈치챘습니다 매화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봄꽃 네 자매 홍역 같기도 하고 황달 같기도 한 젖몸살 돌림병 앓는 줄 삼월이 그림자 거둘 무렵에야 깨달았습니다 겨울 궁전에서 동상 견딘 얼음 공주 언 손 봄볕 쬘 사이도 없이 자매들 초경 앓는 신음 견디다 못해 알몸 분신공양, 봄을 익히고 있습니다 어린 처녀 연달래 시집갈 나이 진달래 혼기 놓친 난달래 무덤가 맴돌다 미쳐버린 금달래 슬피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진달래 그렇게 참꽃이 되었습니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

한줄 詩 2021.03.29

몽골 소년의 눈물 - 안상학

몽골 소년의 눈물 - 안상학 염소가 풀을 뽑아 먹는 동안 사막은 저도 모르게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더 막막해져 가는 사막에서도 지금 여기 없는 꿈이 지금 여기 있는 아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사막의 한 줌 낙타 똥 같은 어느 마을 할아비 밑에서 자라는 어미 아비 없는 소년을 만났다 할아비는 사위 집에 손자를 맡기고 떠났다, 멀어지는 트럭 발을 동동 구르며 마구 허공을 할퀴던 조막손 소년은 마을 어귀 모래언덕까지 올라가 한참을 바라고 서 있었다 몽골은 눈물이 드물다는데 소년의 눈물 광막한 곳에서는 헤어지는 시간도 길었다 지금 여기 없는 꿈이 지금 여기 있는 아픔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몽골식 이별을 보면서 양고기칼국수를 먹으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여태 만나 온 삶의 아픔과 그래도 살게끔 한 꿈..

한줄 詩 2021.03.29

아버지의 꽃 - 이서린

아버지의 꽃 - 이서린 어시장 왁자한 어물전마다 커다란 고무 통 찬물에 잠긴 다발다발 무수한 주홍빛 돌기 봄이다 어린 딸들은 마루 끝에 앉아 햇볕을 받고 어머닌 수돗가에서 멍게를 손질하였고 맨드라미 꽃씨를 심는 아버지의 손목에 선명한 힘줄 가장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작은 술상이 차려지고 아버지는 손을 비볐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둔 아버지의 버릇, 햇빛에 반짝이는 술잔 알싸한 멍게향이 일요일 오후에 스몄다 딸 셋을 나란히 앉혀 놓고 붉은 낯빛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선창을 불렀고 음치에 가까운 어머니의 봄날은 간다가 이어졌다 얘들아, 아버진 말이다 봄이 오면 멍게가 단연 좋더라 이 바다 냄새가 참 좋더라 바다에서 피는 꽃 같지 않냐 초장에 찍은 멍게를 먹이려는 아버지와 한사코 싫다는 딸들의 실랑이..

한줄 詩 2021.03.28

한때, 우리들의 파란만장 - 이기영

한때, 우리들의 파란만장 - 이기영 창밖에는 잎 하나도 달지 않은 나무 한 그루 나무는 가장 추운 방식으로 눈보라와 마주하지 허기를 반죽하는 손목이 시리고 봄을 향해 부푸는 파일들을 딸깍, 딸깍, 하나씩 열어 볼 거야 그때 2월과 7월 날아가면서 떨어뜨린 새의 깃털보다 가벼이 떠나 버린 그녀와 그녀를 잠깐 떠올릴 거야 지금까지 어쩌다 12월까지 말 한마디 없이 그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계속해서 불면에 시달리는 밤들을 목 조르며 견디지 않겠어 달은 이미 다 부풀어 올랐고 이제 그만 모든 기다림을 지워야겠어 나는,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걷는사람 난간 - 이기영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은 그곳의 계절을 몰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보라를 위로하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

한줄 詩 2021.03.28

징한 것 - 김보일

징한 것 - 김보일 나에게 커피는 '달다'와 '쓰다'밖에 없다 아는 커피의 이름이라고는 아메리카노 하나 수많은 와인의 종류도 내게는 그저 감당하기 힘든 외국어일뿐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는 자동차가 그랬다 소나타, 그랜저, 프라이드... 굴러가고 멀미나는 것들은 모두 그냥 '차'였다 젊어 과부가 되고 장가도 가지 않은 두 아들을 잃은 할머니에게 아리고, 저미고, 울멍울멍한 것들은 모두 '징한 것'이었다 만질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봄비1 - 김보일 분홍 꽃도, 펄럭이는 치마와 도둑고양이와 이팝나무도, 빨간 자동차와 전봇대와 낡은 처마도, 술에 취한 친구의 구겨진 구두와 할머니의 리어카와 개밥그릇도 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살구나무 빵집 - 김보일..

한줄 詩 2021.03.28

꽃들의 경련 - 김윤배

꽃들의 경련 - 김윤배 산수유가 노랗게 치정의 말들을 버리고 진달래가 욕정을 못 이겨 질펀하게 누웠다면 꽃들의 경련을 본 것이다 꽃들은 치정과 욕정 사이에 길게는 열흘간의 생애를 던진다 꽃잎 한 장에 달그림자를 그리고 꽃잎 한 장에 비탄을 그리고 뛰어내리는 그곳이 대지거나 강물이거나 낙화의 순간은 숨 막히는 적막이어서 그걸 보았다면 진실에 가깝다 그곳은 어둠의 숲이거나 소신의 꽃불이다 대리석 바닥에 새겨진 명문은 숨겨졌던 연서였다 꽃잎에 새겨져야 거미줄 위로 파경을 옮길 수 있다 한 생애, 꽃잎 뛰어내리는 순간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반생 - 김윤배 원망과 냉소로 반생을 가시밭에 두었습니다 원망과 냉소는 목련꽃 짧은 생애에서 크고 깊습니다 가지를 옮겨 앉는 새들이 종일 눈길 주던 목련꽃은..

한줄 詩 2021.03.27

동자동 사람들 - 정택진

서울 토박이들도 서울 도심에 있는 동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행정동명은 그런대로 알고 있어도 법정동명은 이런 동네도 있었나 할 정도로 아리송한 동들이 많다. 수시로 서울 도심을 걷는 편인데 걷다 보면 듣도 보도 못한 동 이름이 꽤 된다. 북촌 근처에 있는 팔판동, 소격동, 체부동, 을지로 부근의 산림동, 입정동, 예관동, 서울역에서 가까운 서계동, 문배동 등이다. 용산구에 속한 동자동도 마찬가지로 서울역 맞은 편에 있으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동자동은 종로 3가와 함께 예전에는 서울 도심의 대표적 집창촌이었다. 서울역과 남대문 시장이 가까워서 나그네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좋은 위치다. 성매매 단속으로 윤락업소가 떠난 자리에 노동자들의 값싼 숙소로 이용되었다. 현재 동자동은 서울의 ..

네줄 冊 2021.03.26

플라스틱 - 조성순

플라스틱 - 조성순 환타스틱하게 온갖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도구 너무 친숙하여 공기나 물과 같이 되었지. 가볍고 깨지지 않아 이곳 생활을 마치고 은하계로 떠날 때 필수 지참품으로 갖고 가고픈 것 지천으로 흔하여 귀하지 않게 된 것 박을 길러 여물 때까지 기다리거나 불을 때서 옹기를 제작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어느 순간 너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물을 담는 용기로는 제격 둥둥 뜨는 데는 그야말로 플라스틱은 환타스틱 어린 코끼리는 거친 풀잎보다 부드러운 플라스틱을 좋아하지. 고래 배 속에도 들어가고 스스로 진화하여 바닷가 바위에도 껌딱지 모양 붙어 생물인 체도 한다. 거북손 미역 파래와도 영역 다툼을 한다. 금 간 다리도 붙여 주고 상처 입은 내 영혼에도 와서 벌어진 틈을 메워 주어라. ..

한줄 詩 2021.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