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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다행한 - 천양희 시집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게 책이 없었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특히 시집이 그렇다. 영국에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시를 읽으며 달랬다. 당시 한 직원 때문에 한동안 불면증이 올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잠을 못 자 몽롱한 정신에도 시를 읽으면 마음이 진정 되었다. 천양희 시집이 그랬다. 한국에 왔다 돌아갈 때마다 몇 권의 시집을 꼭 챙겼다. 일단 오래 읽을 수 있어서 시집이 좋았다. 그 속에 천양희 시집이 있었다. 2017년, 15년 만에 돌아와서 그동안 밀렸던 시집을 찾아 읽었다.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은 없는데 읽고 싶었던 시집은 많았다. 시에 대한 갈증이랄까. 천양희 시집을 찬찬히 다시 읽는 계기가 되었다. 물도 급히 먹으면 체하듯 시도 급히 읽으면 사레가 들 수..

네줄 冊 2021.06.03

안개의 취향 - 정선희

안개의 취향 - 정선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때문이야, 당신은 실망한 듯 말했고 먼 곳이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나의 체온이 당신의 지표면보다 차가운 경우 물방울이 당신의 심중 어딘가에 맺혀 시야가 흐릿해지는 현상 나와 당신 관계 그런 말은 몰라도 좋아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영혼의 매개체, 뭐 그런 말도 말고 내가 배롱나무에 붉은 전세를 들거나 이런 말이 이해가 되는 편이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이야기 나는 좀 모호한 것들이 좋아 내가 꽃이나 나비가 되기도 하고 안은 밖이 되기도 하는 무엇보다도 안개 때문에 나는 통유리인 당신을 넘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환상통 - 정선희 그는 낮게 풀처럼 앉아 기타를..

한줄 詩 2021.06.03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 몇 장 남지 않은 달력과 며칠이면 완성된다는 말 당신은 캄캄한 골목을 오가며 끼어들다 지치고 비공식적인 만남을 주선하듯 그 자리를 빙그르르 맴돈다 바람에 그을린 생각들도 낱장으로 뜯겨져 나간다 문득 눈이 부셨고 불 냄새를 맡았다 타다 남은 조각들을 누가 맞출 수 있는가 그을음 속에서 채굴되는 무늬를 누가 설명할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나는 밀실처럼 어둡다 그리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불탄 자리 곳곳에서 쐐기 모양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거룩한 일상에 참여했던 계절은 사그라졌어도 나의 전체가 반으로 뭉개졌어도 저편의 들여다볼 수 있게끔 구름다리를 놓아줄 텐가 밥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어줄 텐가 내게 명자꽃처럼 와줄 텐가 언..

한줄 詩 2021.06.02

길 위의 잠 - 전인식

길 위의 잠 - 전인식 밤이면 내 몸은 동그랗게 말린다 마른 몸에 찾아들기 좋아하는 찬바람을 그리운 사람으로 껴안고 아무렇게나 드러눕는다 내 몸 보기 흉하고 망측스러워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을 자는 나 꿈속에선 아흔아홉 칸 영혼의 집을 짓기도 한다 그 옛날 사람들 마음의 열반을 위해 산천을 떠돌았듯 가는 곳이 길이고 눕는 곳이 집인 이 도시 기슭 무량무량 떠돌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하늘 푸르고 햇살 눈부시다 집 걱정에 자식 걱정 근심 많은 사람들 금리와 주식에 예민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아무렇게나 먹고 자는 삶의 즐거움을 가지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어렵다는 열반은 오로지 몸 똥아리 하나로만 이룰 수 있는 것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호박꽃에는 - 전인식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한 철 ..

한줄 詩 2021.06.01

이불 무덤 - 천수호

이불 무덤 - 천수호 우리집 이불 속 역사는 약사(略史)로만 전해진다 저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아이를 잉태했는지도 저걸 덮고 큰언니가 죽어나간 일도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간단한 엄마의 말로 요약되어 가끔 끙, 하는 신음에만 묻어나올 뿐 완전한 진실은 다 묻혔다 어린 내 발등에 차인 아버지 밥그릇이 두어 번 발라당 넘어졌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카락을 떼고 밥그릇을 다 비우셨고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절절 끓는 온기가 내 발끝을 자주 녹였다는 것도 묵인된 역사였다 누구 발등인지 모를 매끈한 살결에 은근히 발을 잇대기도 했고 그 촉감만큼 매끄러운 눈물도 이불 속에서는 잘 묻혔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 속에서 자랐고 이불 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

한줄 詩 2021.06.01

견고한 낙화 - 손석호

견고한 낙화 - 손석호 ​ 감꽃 지던 마당에서 엄마 되는 게 꿈이던 오월의 아이는 청보리밭 두렁에서 파랗게 흔들렸다 소꿉놀이 밥상에 감꽃 밥을 차려 놓고 쓰러진 보리처럼 수상한 황변이 왔다 아파 보였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엄마처럼 눈빛으로 우는 걸 흉내 내고 있었다 늦은 봄비 소란스러운 밤 비 갠 마당에 찍힌 의문스러운 발자국에 빗물이 가득 고였고 감꽃이 흥건했다 대문 밖 청보리밭을 바라보는 동안 툭 툭, 양철 지붕에서 들리는 빗소리 처마로 떨어진 감꽃이 도르르 눈앞으로 굴러온다 모든 꽃이 낱장 꽃잎으로 부서져 날아갈 때 감꽃은 온몸으로 지고 오래 참은 비꽃처럼 무겁다 해마다 아이는 감꽃처럼 견고하게 오고 내 안의 얇은 지붕을 밤새 두드린다 오월의 밤은 꿸 것이 많고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시집/ ..

한줄 詩 2021.05.31

흔들리며 고맙다고 - 김형로

흔들리며 고맙다고 - 김형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몸 몸의 주름이 펴지지 않는다 굽은 곳은 더 틀어지고 패인 곳은 더 깊어졌다 아픈 몸을 자주 미워했지만 몸은 나를 사랑하기만 했다 비극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 티격태격 도니 말 없던 몸이 말을 한다 귀에서 여치 소리 나고 눈에는 벌레가 난다고 무릎은 녹슨 돌쩌귀 되었다고 밤마다 몸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떠셨냐 손으로 만지며 쓰다듬는다 몸이 답한다 힘닿는 데까지 가 보겠다고, 숨소리가 많이 얕아졌다 함부로 부렸구나 다음 생이 있거든 내가 몸이 될 테니 너는 내가 되거라 결기 없고 시류도 못 맞추는 내가 한쪽 쳐진 몸과 함께 오늘도 어제처럼 간다 절뚝절뚝 흔들리며 고맙다고 힘들면 잡고 서서 높다란 새를 함께 보면서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

한줄 詩 2021.05.31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 박순호 시집

박순호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유명한 시인은 아니지만 꾸준히 시집을 내고 있는 사람이다. 시 쓰기의 길이 자신의 삶과 분리되지 않을 때만이 이렇게 꾸준히 시집을 낼 수 있으리라. 이 시인의 어느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 이런 문구가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이 눈물이었고 상처였지만 쓰여진 시가 눈물과 상처를 치유했다고,, 맞다. 나는 이 문구에서 시에서 벗어나지 못할 이 시인의 운명을 본다. 나같은 독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목숨 걸고 시를 읽진 않지만 이런 시집을 만나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활자 중독의 운명이다. 어떤 시인이 그랬다.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라고,, 어쨌든 시집 출판이 많은 것은 좋은 현상이다. 쏟아져 나오는 시집 중에 이렇게 인연이 닿는 시집을 만날 수 있으..

네줄 冊 2021.05.30

서성이다 - 박형욱

서성이다 - 박형욱 산중 고찰 경내에 머무는 나무는 고목이 되고 산비탈 계곡 따라 떠나는 물은 바다에 닿는다 한자리에 오래 머문다는 것과 쉼 없이 멀리 흐른다는 것은 모두 지극한 합장 언제던가 죽을 만큼 치열해본 적이 생의 절반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해 절집 마당 서성이는 그림자가 있다 *시집/ 이름을 달고 사는 것들의 슬픔/ 도서출판 지혜 남은 이력(履歷) - 박형욱 벽시계가 어느 날 멈췄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면서 인간 수명도 건전지 같다는 생각에 살아온 이력을 더듬어 본다 십대에는 축구만 했다 이십대에는 이데올로기 과식에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나머지 이십 년은 산 속을 네 발로 기어다녔다 복기해볼수록 심장을 때리는 맥박 시계불알처럼 살기 위하여 가불까지 했다니 어디쯤 달렸는지 모르고 사는 건전지 위치..

한줄 詩 2021.05.30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다음 생까지는 멀고 - 김윤배 왜 흰 회벽으로 된 방에 유폐되어 있는지 천천히 하얀 회벽을 둘러보거나 낡은 서간집의 표지를 들여다보거나 부장품, 레벡의 네 현을 튕겨보거나 Time to say goodbye를 허밍으로 노래하거나 여러 개의 촛불을 창틀에 올려놓거나 실루엣이 하얀 회벽에 유령처럼 일렁인다 젖은 눈을 감았다 뜨면 밤이고 다시 감았다 뜨면 낮이다 밤과 낮이 눈동자 안에 있다 창틀의 촛불이 꺼지기 시작한다 황홀한 착란의 시절은 스치듯 지나갔다 유폐는 선택이었다, 밤은 며칠씩 계속되었으니 잠시 행복했고, 늘 얼어 있는 입술로 불행했다 얼어 있는 입술을 이 생에서 녹일 수 없다 다음 생까지는 멀고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청춘 - 김윤배 숲속의 야생화는 아직 지려고 하지 않았는데 마음..

한줄 詩 202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