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견고한 낙화 - 손석호

마루안 2021. 5. 31. 19:32

 

 

견고한 낙화 - 손석호


감꽃 지던 마당에서
엄마 되는 게 꿈이던 
오월의 아이는 청보리밭 두렁에서 파랗게 흔들렸다
소꿉놀이 밥상에 감꽃 밥을 차려 놓고
쓰러진 보리처럼 수상한 황변이 왔다 
아파 보였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엄마처럼 눈빛으로 우는 걸 흉내 내고 있었다
늦은 봄비 소란스러운 밤
비 갠 마당에 찍힌 의문스러운 발자국에 빗물이 가득 고였고
감꽃이 흥건했다

대문 밖 청보리밭을 바라보는 동안
툭 툭, 양철 지붕에서 들리는 빗소리
처마로 떨어진 감꽃이 도르르 눈앞으로 굴러온다
모든 꽃이 낱장 꽃잎으로 부서져 날아갈 때
감꽃은 온몸으로 지고 
오래 참은 비꽃처럼 무겁다
해마다 아이는 감꽃처럼 견고하게 오고
내 안의 얇은 지붕을 밤새 두드린다
오월의 밤은 꿸 것이 많고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파란출판

 

 

 

 

 


숟가락 - 손석호


말이 하고 싶으면
땅을 파요
깊은 곳엔 누군가 있을 것 같아

침묵하고 싶으면
묻어요
묻지 말아야 할 것까지

그럴 땐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다시 땅을 파요
숟가락을 찾아야 하니까

밥솥과 밥그릇이 나와요
뒤집어 쏟아 보고
숟가락이 아니어서
다시 묻어요

더는 묻는 게 힘들어
밥을 먹어요
숟가락을 잊고
맨손으로

가끔
침묵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팠어요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묻었어요

구덩이 위에 올라가
꾹꾹 밟아요
돌을 올려놓아요

나 대신 숟가락이 발굴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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