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불 무덤 - 천수호

마루안 2021. 6. 1. 22:28

 

 

이불 무덤 - 천수호


우리집 이불 속 역사는 약사(略史)로만 전해진다
저 속에서 얼마나 자주 아이를 잉태했는지도
저걸 덮고 큰언니가 죽어나간 일도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간단한 엄마의 말로 요약되어
가끔 끙, 하는 신음에만 묻어나올 뿐
완전한 진실은 다 묻혔다
어린 내 발등에 차인 아버지 밥그릇이 두어 번 발라당 넘어졌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머리카락을 떼고 밥그릇을 다 비우셨고
스테인리스 밥그릇의 절절 끓는 온기가 내 발끝을 자주 녹였다는 것도
묵인된 역사였다
누구 발등인지 모를 매끈한 살결에
은근히 발을 잇대기도 했고
그 촉감만큼 매끄러운 눈물도 이불 속에서는 잘 묻혔다
부화된 아이들은 무럭무럭 그 이불 속에서 자랐고
이불 속으로 도저히 두 발을 숨길 수 없을 때는
하나씩 집을 떠나갔다
하얀 목화솜이 따글따글 씨앗처럼 여물었어도
이불은 아직 색동무늬 밑에 그 뼈다귀들을 묻어놓고
때로는 살을 붙이고 또 때로는 뼈를 깎고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벨트 우체통 - 천수호


갓 쉰이 되어 소나무 아래 묻힌 친구
삼 년 투병하면서 온갖 원망을 남편에게 다 쏟아붓는 것이었는데
그 남편은 별별 소리를 다 듣고도 무심한 법조인이었는데
친구는 그의 무덤덤함이 무덤같이 끔찍하다고
그리움도 외로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푸념처럼 넋두리하곤 했었는데
그 친구, 어느덧 2주기라
모처럼 그 소나무 찾아갔더니
아름드리 그 나무 아래 아랫도리에
친구 남편의 벨트가 단단히 묶여 있다
이 세상일을
다 모르고 떠나는 일이 얼마나 다행인가
혼자 중얼거렸는데
소나무는 제 허리춤의 벨트가
이미 오래 묵은 제 몸의 것이라는 듯
딱 맞는 품으로 편안히도 당겨 끼고 있었다
나는 그 벨트에 엽서 하나를 끼워놓고
묵묵히 돌아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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