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 위의 잠 - 전인식

마루안 2021. 6. 1. 22:33

 

 

길 위의 잠 - 전인식


밤이면 내 몸은 동그랗게 말린다
마른 몸에 찾아들기 좋아하는 찬바람을
그리운 사람으로 껴안고 아무렇게나 드러눕는다


내 몸 보기 흉하고 망측스러워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을 자는 나
꿈속에선 아흔아홉 칸 영혼의 집을 짓기도 한다

그 옛날 사람들 마음의 열반을 위해
산천을 떠돌았듯
가는 곳이 길이고 눕는 곳이 집인 이 도시 기슭
무량무량 떠돌기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하늘 푸르고 햇살 눈부시다

 

집 걱정에 자식 걱정 근심 많은 사람들
금리와 주식에 예민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아무렇게나 먹고 자는 삶의 즐거움을

가지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어렵다는
열반은
오로지 몸 똥아리 하나로만 이룰 수 있는 것

 

*시집/ 검은 해를 보았네/ 불교문예

 

 

 

 

 

 

호박꽃에는 - 전인식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한 철 살아가기에 충분할 텐데
햇살들이 모자라기도 하는지 담벼락 하나 통째로 차지한 채
허공 난간에 길을 만들며 태양 가까이 걸어가는
호박꽃에는 어머니 땀 냄새가 난다


호박덩굴에는 아버지 심장 소리가 들린다
쇠똥거름 지게에 지고 이 밭 저 논 왔다 갔다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가쁜 발자국 소리 들린다
물길 숨어있는 땅 밑으로 쉼 없이 파내려가는
가난한 가장의 삽질과 괭이질 소리 들린다
어디론가 메마른 곳을 향해 콸콸 흘러가는
시원한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둥그렇게 담벼락 위에
보름달만 한 세상 하나 얹어놓은
바라보는 마음 넉넉해지지는 가을 쯤에서야
잎과 줄기, 꽃과 열매 모두 그렇게 
크고 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겠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개의 취향 - 정선희  (0) 2021.06.03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0) 2021.06.02
이불 무덤 - 천수호  (0) 2021.06.01
견고한 낙화 - 손석호  (0) 2021.05.31
흔들리며 고맙다고 - 김형로  (0) 2021.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