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마루안 2021. 6. 2. 22:35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 박순호


몇 장 남지 않은 달력과 며칠이면 완성된다는 말
당신은 캄캄한 골목을 오가며 끼어들다 지치고
비공식적인 만남을 주선하듯
그 자리를 빙그르르 맴돈다
바람에 그을린 생각들도 낱장으로 뜯겨져 나간다
문득 눈이 부셨고 불 냄새를 맡았다

타다 남은 조각들을 누가 맞출 수 있는가
그을음 속에서 채굴되는 무늬를 누가 설명할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나는 밀실처럼 어둡다
그리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불탄 자리 곳곳에서 쐐기 모양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거룩한 일상에 참여했던 계절은 사그라졌어도
나의 전체가 반으로 뭉개졌어도
저편의 들여다볼 수 있게끔
구름다리를 놓아줄 텐가
밥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어줄 텐가
내게 명자꽃처럼 와줄 텐가

언젠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면서도
방향을 묻지 않았다 그럴수록 침묵은 곤욕스러웠다
어느 눈 내리는 날에는 한 묶음이었으나
추위가 한풀 꺾인 어느 날인가
기억을 데리고 오는 낱장들이 발밑에
수북하게 널려 있었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문학의전당

 

 

 

 

 

 

안쪽에서의 파동 - 박순호


당신은 나의 정서 바깥에서 흔들리고
가끔 목이 잠긴 채 창백한 낯빛을 한다
가당치 않은 말과 절박한 숨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를 검열한다
안쪽에는 늘 환풍기가 돌아가지만 미처
쓸어 담지 못한 부스러기와 수레가 지나간 길을 빨아내지 못한다

감정노동은 당신의 시간을 끝까지 추적해서 파괴한다

사흘에 걸쳐 같은 꿈을 꾼다
태양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서
불행했던 전통을 답습하는 꿈

문 안쪽에서 내뱉었던 약속
창 바깥에서 어겼던 약속

깊은 사랑은 폭력과 구분 짓기 어렵다

당신은 흙과 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공간을 상상한다
사전을 뒤적거리면서 이따금씩
삶의 행간에 찍힌 발자국을 지우거나
투정 섞인 욕망을 토로하면서
점차 보폭이 좁아지다가 느려지고
뒤돌아본다

바깥으로 추방당한 노후된 햇빛이 흙을 파먹는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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