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 - 박순호 시집

마루안 2021. 5. 30. 19:54

 

 

 

박순호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유명한 시인은 아니지만 꾸준히 시집을 내고 있는 사람이다. 시 쓰기의 길이 자신의 삶과 분리되지 않을 때만이 이렇게 꾸준히 시집을 낼 수 있으리라. 이 시인의 어느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 이런 문구가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이 눈물이었고 상처였지만 쓰여진 시가 눈물과 상처를 치유했다고,, 맞다. 나는 이 문구에서 시에서 벗어나지 못할 이 시인의 운명을 본다. 나같은 독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목숨 걸고 시를 읽진 않지만 이런 시집을 만나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활자 중독의 운명이다.

 

어떤 시인이 그랬다.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라고,, 어쨌든 시집 출판이 많은 것은 좋은 현상이다. 쏟아져 나오는 시집 중에 이렇게 인연이 닿는 시집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박순호 시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시가 나와 코드가 맞은 탓인지 세상에 나온 그이 시집을 모두 읽었다. 일종의 궁합이 맞는 작가와 독자 관계라고 할까. 이 사람 시를 읽을 때마다 그늘에서 사는 소시민의 착한 삶을 애잔하게 느낀다.

 

약자를 바라보는 이 시인의 천성이다. 노가다판 중년 노동자의 담뱃불로 지운 팔뚝의 문신 자국에서 병든 아내의 완쾌를 바라는 육체노동자의 정직한 노동을 오래 주시한다. 다소 어둡고 쓸쓸하지만 마냥 절망적이지는 않다.

 

이번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 삼킬 때>라는 시집 제목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연어알처럼 시력(詩歷)이 나이테 늘 듯 알차게 박혀 이 시인 특유의 서정성이 더욱 탄탄해졌다. 초기시부터 이번 시집까지 염세적인 시인의 정서는 여전하다.

 

 

그 계절

나는 쓸쓸한 노래를 찾아 들으며 떠돌아 다녔지

종아리에는 길을 찾아 헤맨 핏줄이 자라나고

손가락 마디는 어둠을 담아둔 자루처럼 불룩하고

예상한 대로 상처는 깊어서 손쓸 수가 없었지

여전히 바탕은 만들어지지 않았지

 

*시, <그 계절> 일부

 

어둠을 담은 불룩한 자루를 등에 맨 시인의 뒷모습을 떠올려 본다. 나는 이런 시풍에 공감하며 오래 눈길이 간다. 당분간 이 시인의 시를 끊지 못할 것 같다. 감당 못할 나의 활자 중독을 어찌할까. 나는 우울한 어둠에서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이것도 천성이다.

 

 

선천적 우울 - 박순호

자궁 안에서는 우울마저 따듯했다라고
아직 영글지 못한 그늘
아늑했다라고
쓴,
작위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근황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양수가 터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것이
핏줄을 붙잡고 기웃거릴 거라고
내가 가진 높이를 휘감아 오를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행성을 닮았다는 천문학자의 말
외계생물 같다는 과학자의 말
뿔 달린 귀신이라는 무당의 말
강박증이 가지를 쳤다는 심리학자의 말

그러나
나는 충분히 우울했으므로
주석 따위는 달지 않았다

까마귀가 앉았다 떠난 나뭇가지
검은 깃털이 걸려 있다
우울을 가꾸던
검은 사제
검은 사체들

두서없이 쌓이는 저 막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