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내 따스한 유령들 - 김선우 시집

마루안 2021. 10. 11. 21:17

 

 

 

김선우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이전에 그의 시를 유심히 읽은 기억은 없다. 시에도 마음 가는 시기가 있는지 이번 시집을 들추며 여러 시에 공감을 했다. 시집 읽고 가능한 흔적 남기지 말자는 게 기본 모토이나 이 시집은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코로나 시대에 쓰여진 시가 여럿 실렸고 지친 마음을 달래줄 위로와 희망적인 다짐을 새기게 된다. 인류는 더한 위기에도 살아 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동안 인간이 저지른 악행을 경고하고 미래를 다짐 받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작은 신이 되는 날 - 김선우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나는 이 시집을 이 한 편으로 압축한다.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고 일부 예술계는 쑥대밭이 되었다. 산불로 새까많게 변한 산이 복원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듯 코로나로 망가진 것들 또한 복원이 언제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해외 여행이 막혔고, 국내 여행도 제약을 받거나 눈치가 보인다. 강제로 얼굴을 가리고 출입을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예전에 숙박업소 투숙할 때 숙박계를 써야 했던 것처럼 어디든 기록을 남겨야만 입장이 허용되는 시대다.

 

그래도 인간이 저지른 악행의 댓가치고는 저렴한 편이다. 어쩌면 이 정도에서 더하지 않는 걸 감사하며 더욱 겸손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섬뜩한 경고와 따뜻한 위로가 교차하며 자주 펼쳐 보게 되는 시집이다.

 

아무리 참혹한 질병이 닥치더라도 결국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임을 말해준다. 시인은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인의 말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인간이 만든 세상의 참혹함.

그럼에도 존재하는

어떤 아름다움들.

고통에 연대하는 간곡한 마음들.

작고 여리고 홀연한 그 아름다움에 기대어

오늘이 탄생하고 내일이 기다려집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의 무수한 스승들이여!

 

*시인의 말/ 앞부분

 

시인은 실제 코로나 시작과 함께 건강이 많이 나빴던 모양이다. 회복하기까지 꼬박 일년이 걸렸고 그동안 마음에 쓰였던 일은 독자에게 받은 편지에 답신을 못한 거였다고 고백한다.

 

시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이런 문장도 인상적이다.

*시를 통해 시의 마음으로 건너온 메시지엔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시로 눈물과 기쁨과 위로와 아름다움이 되는 자리를 돌보는 일은 시인의 소중한 책무니까요. *시인의 말 부문

 

1970년 출생인 김선우 시인도 어느덧 지천명을 넘겼으니 이제 중견 시인이 되었다. 中堅, 문학계뿐 아니라 어느 집단이든 중견은 나이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집은 충분히 중견 소리 들을 만한 깊이와 무게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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