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얗게 저미는 바깥 - 송병호
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알코올의 표정도 진다
좁은 보폭으로
비켜 가는 숲
먼저 난 것이라고 먼저 지는 것도 아닌데
계절을 업고 가는 바람처럼
누구는 돌아가고 누구는 다시 오고
좋은 말을 해도
좋게 들리지 않아
눈만 멀뚱, 먼 산 바라보는 사슴처럼
책갈피에 화석이 된 색 고운 엽서 한 장
詩의 주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살충등 손님 뜸하고
발자국 거꾸로 걷는 서걱거리는 저녁
이별이다
삭연한 그림자가 돌아오는
*시집/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 상상인
느린 우체통 - 송병호
다리를 풀고 무형의 영역으로 가는 사람들
시간은 확고한 빗장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흔한 것들은 눈에 뜸해지고
칸칸마다 채워가야 할 계절의 끝자락
모든 것이 병약했던 때의 흔적이다
어느 한 때로 거슬러 가지만, 다가갈수록
서쪽을 향한 발끝은 가깝고
곤궁은 버릴 것이 없는데도 여전히 가볍다
끝은 시작의 고리인 줄 알면서
초승에서 그믐을 셈한다
불가분의 숫자들처럼
눈뜨면 더 멀어지고 마는 나와 또 다른 나
화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꽃술과는 달리
보폭이 빨라질수록 나를
이식해왔던 내 그림자는
해를 등진 십 리 밖
저릿저릿 상여길 같은 우체통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점치지 못할 내 유통기한
빠른 등기도 택배도 아닌
수신자 없는 하얀 주소를 적어 우체통에 넣어야겠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천년으로 산다는데
인기척 없을 어딘가를 하염없이 맴돌
지금을 부친다
# 송병호 시인은 2018년 <예술세계> 신인상 수상,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궁핍의 자유>, <환유의 법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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