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의외의 대답 - 천양희

마루안 2021. 11. 15. 21:50

 

 

의외의 대답 - 천양희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보다 침묵으로 말하겠다

강변에 나가 앉아

물새야 왜 우느냐 물어보았던 것

나는 왜 생겨났나 생각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흘러가는 말로 다시 말하겠다

강가에 서서

그냥 미소 짓고 답하지 않는 노을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

나는 왜 사나 알아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

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

무릎 꿇고 앉아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

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

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

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

나를 잃는 것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되풀이 - 천양희

 

 

땅이 꺼질 듯 한숨 쉬어도

바닥은 한사코 저를 놓아주지 않고

하늘이 무너질 듯 절망해도

우리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

 

사랑은 맺거나 이루지 않으면서도 빠지기만 하고

죽음만이 사람을 갈라놓는다면서도

삶이 사람을 떼어놓기도 한다

 

보고 싶어 죽겠다면서도 죽는 사람 없고

분명하게 꽃은 진다

 

세월이 좀먹지 않는다면서도

시간은 좀팽이처럼 서둘러 가버리고

하던 일 그만두면서도

고민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겠다면서도

다르지 않게 살기도 하고

숲은 적당히 베어줘야 잘 자란다면서도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베기도 한다

 

증오와 혐오 사이에서도 각오를 하고

잡초 우거진 오솔길에서

나는 천천히 내가 된 것이다

 

이것이 어제의 되풀이라면

오늘은 되돌아서서 풀이해보겠다

되풀이가 되물림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