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끗 - 이정희
공중이 휘어지면
계절의 한 부분이 꺾인다
휘어짐의 끝은
붉게 익은 홍시 몇 개 달려 있는 것
높은 곳의 가지를 휘는데
튕겨나가며 잘 휘어지지 않는다
그건 감 몇 개를 지켜내겠다는
나뭇가지들의 완고한 힘이다
그들만의 반경이고 외침인 것이다
높은 것들은 다시
높은 것들이 와서 먹겠지만
허공은 한 번의 그 빈자리를 망각한 적 없다
잡아당겼던 힘으로 겨우
이파리만 훑어 민망한 적 있다
나뭇가지들은 휘어지는 일로
얼마나 자신을 증명해야 할까
무수한 사이와 간극에
함몰된 긴장을
허공으로 튕겨 내려했을까
불안의 간격 그 갈라진 틈 사이
한끗으로 비켜간 안도가 수북하다
끝까지 지켜낸 것들은
결국 바닥의 것이 되겠지만
휘고 또 휘어지더라도
지켜내고 싶은 생명이 있다
*시집/ 꽃의 그다음/ 상상인
꽃의 폐업 - 이정희
꽃도 따끈할 때 꽃이지
식으면 폐업이다
리어카에 실린 채 방치된
국화빵을 구워내던 틀
한때는 한 봉지의 가을이 제철
따뜻했다는 증거
기억을 붓고
시간을 노릇하게 뒤집으며
사는 일이 다 그런 것이라 믿었다
쉴 틈 없는 반복이
일생을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붙들지 못한 가을이 몇 번 지나갔다
추웠던 꽃의 틀이 녹슬고
뜨뜻미지근한 가을볕도 없이 겨울이 왔다
볕 좋고 목 좋은 모퉁이는 점점 줄어들고
철컥철컥 꽃 피우던 가을은
너무 비싸졌거나 멀리 있다
바람이 보채는 곳마다
안간힘 쓰는 꽃잎들과
단단히 묶인 포장의 날갯짓
녹슨 틀에 다급한 생계를 넣고
꼬챙이로 칸칸 노란 국화를 뒤집으면
따뜻한 그 봉지를 안고 돌아갈 것 같은데
햇살이 철컥거리며 그림자 빵을 구워낸다
꽃의 그다음은 믿지 않는다
*시인의 말
그다음을 앓는다
수많은 내일이 지나간다
바람이 치어 떼처럼
멀어진다 더 가까워진다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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